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촉발된 은행 유동성 위기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대규모 예금인출 요구(뱅크런)를 견디지 못해 폐쇄조처가 내려진 실리콘밸리은행과 시그니처은행은 도화선일 뿐이다.
다른 미국 중소형 은행들의 신용등급이 무더기 강등되고, 158년의 역사를 가진 크레디스위스(CS)은행 같은 초대형 은행까지 유동성 압박을 받고 있다. 미국과 유럽 전체 은행권의 시스템 위기로 번질 우려도 조심스레 나온다. 2008년 미국발 세계 금융위기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듯한 상황이다.
두 은행의 뱅크런 사태에 대해 미 정부와 금융당국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과감하게 개입했다. 미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두 은행 예금 고객들의 경우 현재 예금보장 상한액인 25만달러를 넘는 예금까지 보호해주기로 했다. 또 연준은 다른 예금인출 압박을 받는 중소형은행들을 위해 ‘은행기간대출프로그램’ (BTFP:Bank Term Funding Program)을 새로 개설해 긴급 유동성 지원에 나섰다. 이 프로그램에 따라 연준은 미국 국채나 주택저당증권(MBS) 등을 담보를 내놓는 예금기관에 최장 1년 동안 대출해주는데, 담보가치를 ‘시장 가치’가 아닌 ‘액면가’(만기 때 돌려받는 금액)로 인정해주는 게 특징이다.
이렇게 하면 시장에 내다 팔 경우 손실이 발생할 수 있는 은행 자산을 중앙은행이 비싸게 사주는 셈이 된다. 미국 최대 은행인 제이피모건-체이스는 16일(현지시각) 연준 은행기간대출프로그램을 통해 은행권에 공급해야 할 유동성 규모가 약 2조달러(약 2625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이런 유동성 지원은 물가 안정을 위한 미 연준의 통화정책 기조와 배치된다. 연준은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여덟 차례나 정책금리 인상을 단행해, 상단 기준 연 0.25%이던 정책금리를 현재 4.75%까지 끌어올렸다. 또 국채 매입 등을 통한 양적 완화(QE)도 양적 축소(QT)로 전환해 통화 긴축 기조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다 돌발 사태를 만나 그간의 정책 기조와 모순되는 대책을 시행하고 있는 것이다.
미 정부와 금융당국의 과감한 개입으로 금융시장의 극심한 불안 심리는 어느 정도 진정된 모습이다. 유동성 위기의 확산 우려도 수그러들고 있다. 유례없이 신속하고 과감한 대응이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문제는 정치적 후폭풍이다. 시장경제 원리를 벗어난 구제금융이 아니냐는 비판 때문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재닛 앨런 재무장관은 대응 초기부터 “납세자 돈이 들어가는 구제금융은 결코 없다”고 강조해왔다. 두 은행의 예금자만 보호해 줄 뿐 주주나 경영진, 채권 등 다른 유가증권 보유자에 대한 지원은 한 푼도 없다는 이유를 내세운다. 하지만 예금보험 한도를 초과하는 거액 자산가들에 대한 예금 보장의 재원은 다른 모든 은행 서비스 이용자들이 낸 보험료이다. 실리콘밸리은행이나 시그니처은행의 고객들은 대부분 벤처 투자 회사나 디지털과 바이오산업 분야에서 잘나가는 스타트업 법인이거나 고액 연봉을 받는 개인들이다. 이들의 재산 보호를 위해 모든 소액 은행 고객들의 보험료 부담이 커질 수도 있다.
경제사학자인 마이클 허드슨 미주리대 석좌교수는 이번 사태의 전개 과정을 두고 한 온라인 방송과의 대담에서 “예금 무제한 지급 보장과 중소형은행에 대한 중앙은행의 유동성 지원은 모두 대규모 구제금융”이라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와 비교해보면 본질적으로 대응 방식이 달라진 게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기가 발생하면 대기업과 금융자본, 자산가들을 위한 사회주의가 발동되고, 나머지 모든 사람은 약탈적 금융자본주의의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익의 사유화와 위험·손실의 사회화’의 또 다른 사례란 뜻이다.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수석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사이먼 존슨 매사추세츠공과대(MIT) 경영대학원(슬론) 교수는 “금융시장의 혼란과 위기 확산을 막기 위해 정부와 금융당국이 신속하게 개입한 것은 적절한 조처였다”라면서도 “다만 규제와 감독 체계의 전면 재정비 방안이 함께 나와야 한다. 은행들에는 유동성 위기가 발생하더라도 언제든지 자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완충 자본 확충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리콘밸리은행의 파산은 자산 포트폴리오의 편중과 취약한 내부 위험관리시스템 때문이었다. 특히 초저금리 때 매입한 장기물 국채의 가치가 금리 상승기에 떨어지면서 자산 부실을 키웠다.
은행 보유 자산 중 ‘만기보유증권’으로 분류된 자산은 금리가 상승하더라도 회계상 손실로 처리되지 않는다. 이자수익이 꾸준히 발생하므로 대차대조표에는 안전한 자산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동성이 급해지면 자산을 매각할 수밖에 없고, 이때 증권의 실질 가치가 수면 위에 드러나면서 손익계산서에 ‘매각 손실’로 잡힌다. 이른바 ‘미실현 손실’이 실제 손실로 실현되는 것이다. 이런 ‘실현된’ 손실이 한꺼번에 자기자본을 잠식하며 재무 건전성 문제가 불거지면 대규모 예금 인출이나 고객 이탈로 이어진다.
국내 시중은행들의 자산에서는 이런 잠재적 부실 위험이 나타날 가능성이 작다. 국내 은행들은 대부분 예수금을 기업이나 가계에 대한 대출 자금으로 운용하기 때문이다. 대출에 대한 내외부 위험 관리체계도 촘촘하다.
그러나 비은행권 사정은 사뭇 다르다. 박준우 케이비(KB)증권 분석가는 “금리 상승에 따라 보유 자산의 하락 위험이 전반적으로 커졌고, 가치가 떨어진 자산을 재금융화하는 과정의 자금 조달 여건은 더욱 어려워졌다”며 “자산을 장부가로 평가하거나 재평가를 느리게 진행하는 금융회사의 유동성 위험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발행되는 유동화증권을 들 수 있다. 부동산 피에프와 연동된 채권이나 증권은 보통 2~3년 뒤에 발생하는 현금흐름을 보고 제공되기 때문에 위험도와 시장 가치를 제대로 매길 수가 없다. 고수익 뒤에 따라붙기 마련인 고위험 금융상품인 까닭이다.
피에프 관련 증권의 위험은 이를 자산으로 보유하고 있는 저축은행과 보험사 등뿐만 아니다. 이 증권을 발행할 때 신용 보강을 해주는 증권사도 동반 부실 위험에 노출돼 있다. 증권사들이 신용 보강을 해준 피에프 증권을 ‘우발채무’로 회계 처리하는 까닭이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증권사의 피에프 대출 관련 우발채무는 지난해 말 기준 20조9천억원에 이르며, 이 가운데 증권사가 가치 손실 위험을 부담해야 하는 ‘매입 확약’ 비율이 19조6천억원으로 94.2%의 비중을 차지한다. 박해식 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증권사 우발채무 중 매입 확약 비율이 높다는 것은 증권사가 부동산 PF대출 관련 신용위험에 크게 노출됐다는 의미”라면서 “시공사 부실과 미분양 확대, 입주 포기 증가에 따른 신용 사건이 발생하면 증권사의 우발채무는 확정채무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실리콘밸리은행 사태 전개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금융 생태계의 변화는 특정 회사나 업종에서 불거지는 문제가 전체 시스템 위기를 유발할 정도로 상호 연계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국내 금융권도 예외일 수 없다. 특히 디지털 경제의 확산으로 금융 위기의 전파도 광속으로 빨라졌다. 철저하고 효율적인 사전 예방과 점검 체계가 필요하다.
박순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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