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벨기에 공군 소속 F-16 전투기가 핵전쟁 대비 훈련에서 비행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줄기찬 요구에도 불가하다던 입장을 바꿔 F-16 전투기 제공을 위한 ‘국제 전투기 연합’에 참여하기로 했다. 일단 동맹국들의 제공에 대비해 우크라이나 조종사 훈련을 지원한다는 것으로, ‘전투기는 안 된다’는 주장을 접은 것이라 전쟁 판도에 상당한 영향이 예상된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20일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가 열린 일본 히로시마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F-16을 지원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에 동참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설리번 보좌관은 전날 조 바이든 대통령이 다른 정상들에게 우크라이나 조종사들에게 유럽에서 훈련을 제공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고 전했다. 그는 “우리는 지금까지 제공하겠다고 밝힌 것들을 모두 제공해 반격 작전에서 성과를 올리도록 했다”며 “이제는 우크라이나가 앞으로 러시아의 공격을 막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를 따져보고 있다”고 했다.
미국은 당장 자국의 F-16을 주겠다고 하지는 않았으나 이 기종의 우크라이나 이전 문제를 동맹국들과 논의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미국은 동맹국들이 미국산 F-16을 이전할 수 있도록 이미 허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엔엔>(CNN)은 미국 행정부 관계자가 “몇달간 (우크라이나 조종사) 훈련이 진행될 것이며, (전투기 제공) 연합 참여국들은 언제, 얼마나, 누가 제공할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훈련은 여름에 시작한다고 했다.
<워싱턴 포스트>는 미국의 입장 변화는 유럽 동맹국들 요구 때문이라고 전했다. 지난 16일 만난 수낵 총리와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F-16 제공을 위한 국제 협력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제공 가능성이 있는 국가들로는 영국·네덜란드·덴마크·노르웨이·폴란드가 거론된다. F-16을 1천기가량 보유한 미국은 유럽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전투기를 주면 이 나라들의 부족분을 메워주는 식으로 지원할 수도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F-16 제공 기정사실화로 러시아의 공중전 우세는 타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미국 등 나토 쪽은 탱크, 미사일, 패트리엇 방공시스템 등을 우크라이나에 제공했으며, 전투기는 ‘최후의 무기’로 불려왔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2월 전쟁 발발 직후 옛 소련제 미그-29 전투기 제공을 요구했다. 옛 소련 공화국이었던 자국 조종사들이 이 기종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이에 폴란드는 미그-29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는 대신 F-16을 자국에 공급해달라고 했지만 미국은 미온적이었다. 전투기는 러시아 영토 공격에 쓰여 러시아를 지나치게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를 댔다. 이후 바이든 대통령은 F-16을 달라는 우크라이나의 요구에 거부 의사를 몇 차례나 밝혔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전략소통조정관은 지난 15일만 해도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했다. 미국은 한편으로 3월에 우크라이나 조종사 2명을 초청해 F-16을 비롯한 미국 군용기 운용 능력을 평가하며 전투기 제공 가능성을 완전히 닫지는 않았다.
최근 폴란드는 14기, 슬로바키아는 13기의 미그-29를 우크라이나에 넘겼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공중전 능력이 뛰어난 F-16이 매우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히로시마로 향하는 길에 바이든 대통령의 입장 변화 소식을 접하고 “‘국제 전투기 연합’을 지원하기 위한 미국과 미국 대통령의 역사적 결단”이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타스> 통신은 알렉산드르 그루시코 러시아 외무부 차관이 이런 움직임에 대해 “서구 국가들은 여전히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집착한다”며 “스스로에게 엄청난 위험을 안기는 행위”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21일 히로시마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회담한 바이든 대통령은 탄약, 대포, 장갑차를 추가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우크라이나 방어를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다 하겠다고 말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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