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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유럽

[우크라 현지]폭격 맞은 삶터지만…우크라 난민들, 집으로 집으로

등록 2022-06-13 17:36수정 2022-06-14 14:34

[우크라이나를 다시 가다 (2)- ‘귀향 버스’ 14시간 르포]

4월 들어 동남부로 전선 교착되며
우크라 난민들 대거 고향으로 돌아와
100일 넘는 전쟁 상흔 여전하지만
‘난민’에서 ‘시민’으로 새 희망 꿈꿔
13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거쳐 체르니히우로 가는 버스에 탄 한 어린이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고 있다. 키이우/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3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키이우를 거쳐 체르니히우로 가는 버스에 탄 한 어린이가 우크라이나 국기를 흔들고 있다. 키이우/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겨레> 취재진은 개전 110일째를 맞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의 참상을 전하기 위해 지난 3월에 이어 2차로 우크라이나 현지 취재에 나섰다. 13일부터 2주 동안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중심으로 러시아 군대가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남긴 깊은 상흔을 짚어본다. 앞서 노지원·김혜윤 기자는 3월5일부터 2주간 우크라이나 접경 지대를 취재한 바 있다.

버스가 승객을 가득 싣고 달린다. 바르샤바·프라하 등 유럽 각국의 수도에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로 이동하는 ‘국경을 넘는 버스’다. 

12일 저녁 6시30분(현지시각) 폴란드 바르샤바 서부 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57인승 대형 버스는 만석이었다. 승객 57명 가운데 남성은 아기 둘을 포함한 어린이 넷에 나이든 할아버지 등 여섯명뿐이었다.

요람 속 아기는 엄마, 할머니와 번갈아 눈을 맞추며 방긋 웃었다. 한살배기 아기는 엄마 무릎을 타고 서서 신이 났다. 복도 건너편 옆자리에 앉은 형을 봤다가,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봤다가, 연신 방긋방긋 웃으며 종알거렸다. 아기와 엄마 바로 뒷자리에 앉은 여성은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저녁 식사다. 그 뒤에 앉은 나이든 여성은 야무지게 목베개를 하고 일찌감치 잠을 청했다.

12일(현지시각) 저녁 폴란드 동부 조신 지역에 있는 국경 검문소에서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는 버스들이 승객들의 여권 심사 과정을 위해 정차해 있다. 이곳을 통과하기까지 1시간30분가량 걸렸다. 김혜윤 기자
12일(현지시각) 저녁 폴란드 동부 조신 지역에 있는 국경 검문소에서 우크라이나로 들어가는 버스들이 승객들의 여권 심사 과정을 위해 정차해 있다. 이곳을 통과하기까지 1시간30분가량 걸렸다. 김혜윤 기자

<한겨레> 취재진은 지난 3월 2주 동안 우크라이나 서부와 국경을 접한 폴란드에 머물며 전쟁을 피해 국경을 넘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의 다양한 사연을 전했다. 계절이 바뀌어 폴란드 바르샤바는 어느새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초여름으로 변해 있었다. 습기와 냉기가 합쳐진 강력한 추위가 뼛속을 때렸던 3월과 달리 날씨는 훈훈해졌고, 거리를 지나는 이들의 복장과 표정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2월 말 시작된 전쟁은 벌써 석달 넘게 이어지고 있지만, 3월 말~4월 초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 주변에서 철수하고 동부 돈바스를 중심으로 전선이 교착되면서 난민 수는 부쩍 줄었다. <한겨레> 취재진이 폴란드 현장에 있던 3월8일 하루에만 우크라이나인 14만명이 폴란드로 입국했는데 그 규모는 6월 현재 2만명으로 크게 줄었다. 개전 이후 10일 현재까지 폴란드로 들어온 우크라이나 피란민은 모두 395만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 타지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향하는 이들이 이 귀국 버스의 주요 고객인 셈이다.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저녁 무렵 출발한 버스는 4시간을 내리 달려 밤 11시 폴란드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 검문소 앞에 도착해서도 15분 정도 기다린 뒤에야 철제 울타리를 넘어 검문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먼저 도착한 버스들이 통관 절차를 밟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일부는 화장실로 우르르 몰려가고, 일부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밤공기가 쌀쌀했다. 사람들은 검문소 한쪽에 마련된 작은 천막에서 봉사자가 나눠주는 커피와 차를 마셨다. 어둑어둑한 검문소 하늘에 보름달이 떴다. 둥글고 밝았다.

13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리우네를 거쳐 노보흐라드볼린스키를 지나 지토미르로 향하는 E40번 도로 중간중간 검문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우크라이나/김혜윤 기자
13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리우네를 거쳐 노보흐라드볼린스키를 지나 지토미르로 향하는 E40번 도로 중간중간 검문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우크라이나/김혜윤 기자

“이제 버스에 타세요!”

밤 11시30분. 운전기사가 흩어진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버스가 검문소 안쪽으로 들어서자 폴란드 경찰이 여권을 수거해 갔다. “우크라이나”라고 적힌 파란 여권이 대부분이었다. 검문소 바로 옆 칸에는 비슷하게 생긴 57인승 버스이지만 층이 2개여서 더 키가 큰 버스가 같은 절차를 거치고 있었다. 이 버스에 탄 승객도 대부분 집으로 돌아가는 우크라이나인들이다.

13일 새벽 1시. 버스 안에서 날짜가 바뀌었다. 통관 절차를 모두 마친 버스가 어둠 속에서 15분을 기다리자 이번에는 우크라이나 군인이 버스에 올라 여권을 걷어 갔다. 새벽 1시43분, 버스가 다시 시동을 걸었다. 버스는 칠흑처럼 어두운 우크라이나의 밤공기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빅토리아(28)는 아홉살 올렉시, 태어난 지 1년4개월이 지난 옐리세이의 엄마다. 러시아군이 키이우 점령을 위해 진격해오던 지난 3월 초 아이들과 집을 떠났다. 그가 살던 곳은 키이우에서 서쪽으로 130㎞ 정도 떨어진 도시 지토미르이다. 다행히 삼촌과 여동생 가족이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 있었다. 빅토리아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피난을 결심했다. “원래 이렇게 오래 나오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피난처는 안전했지만 편안함을 느낄 수 없었다. 세차례나 집에 돌아가려 했지만, 전쟁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가 귀향 의사를 밝힐 때마다 여동생과 삼촌이 뜯어말렸다. 번번이 아이들 걱정에 발이 묶였다. 하지만 얼마 전 ‘더는 안 되겠다’ 싶어어 결심을 굳혔다. 그는 최근 도시가 좀 조용해졌고, 폭탄 세례가 그다지 대단하지도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13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리우네를 거쳐 노보흐라드볼린스키를 지나 지토미르로 향하는 E40번 도로 중간중간 검문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우크라이나/김혜윤 기자
13일(현지시각) 아침 우크라이나 리우네를 거쳐 노보흐라드볼린스키를 지나 지토미르로 향하는 E40번 도로 중간중간 검문초소가 설치되어 있다. 우크라이나/김혜윤 기자

집으로 돌아온 뒤엔 지역 방어군으로 활동하며 부모님을 돌보는 남편을 도울 생각이다. 빅토리아가 ‘아빠’ 이야기를 꺼내자 옐리세이가 칭얼대기 시작했다. 빅토리아는 무릎을 들썩이며 아이를 달랬다. “이제 굳이 다른 나라로 떠나지 않으려고 해요. 남편이 너무 그리워요.”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지만, 남편과 재회할 생각에, 또 다른 이의 도움 없이 두 발로 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벌써 부푼 모습이었다.

빅토리아의 대각선 앞자리에 앉아 있던 덴마크인 쿠르키(57)가 말을 거들었다. 그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유럽으로 가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 나라에서 받아주더라도 먹고살려면 취업을 해야 하는데 쉽지 않죠. 무료 교통, 음식을 제공해준다고 해도 그게 다가 아닙니다.” 약사인 그는 키이우에서 자원봉사를 하려고 가는 길이다.

13일(현지시각) 아침 폴란드 바르샤바를 출발해 우크라이나 지토미르 버스터미널에 내린 가족들의 짐을 한 남성이 차에 싣고 있다. 지토미르/김혜윤 기자
13일(현지시각) 아침 폴란드 바르샤바를 출발해 우크라이나 지토미르 버스터미널에 내린 가족들의 짐을 한 남성이 차에 싣고 있다. 지토미르/김혜윤 기자

새벽 4시50분. 저만치 동쪽 하늘에서 떠오른 붉은 해가 버스 창 안으로 파고들었다. 국경을 넘은 버스는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리우네에서 처음 멈췄다. 아침 공기가 차갑다. 5분쯤 지나자 바로 옆 플랫폼에 비슷하게 생긴 대형 버스가 들어왔다. 체코 수도 프라하에서 똑같이 밤을 달려온 버스다. 중년 여성 둘이 내려 택시를 잡아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정거장 근처에 보이는 아파트는 많이 낡아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져 있었다. 베란다에 널어둔 붉은색의 빨랫감이 눈에 띄었다.

한참 얘기를 주고받았던 빅토리아는 다시 두어 시간 달려 도착한 지토미르에서 아침 7시35분 하차했다. 남편이자 아이들 아빠가 마중을 나왔다.

13일(현지시각) 오전 우크라이나 키이우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연인을 한 남성이 반기고 있다. 키이우/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13일(현지시각) 오전 우크라이나 키이우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연인을 한 남성이 반기고 있다. 키이우/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버스는 다시 네댓 시간을 더 달려 아침 9시45분 키이우에 도착했다. 버스 창 밖으로 해가 점점 더 높이 떴다. 차창 밖으로 드넓은 평야가 자주 펼쳐졌다. 어느 마을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전차나 탱크를 막을 목적으로 설치한 듯한 구조물이 보였다. 모래주머니와 벽돌을 수백개씩 쌓아 만든 참호는 이곳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음을 짐작게 했다. 키이우 중심에 가까워지자 러시아군의 폭격을 맞은 건물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터전이었을 아파트는 외벽이 까맣게 그을렸고 창문이 다 깨져 해골처럼 보였다.

바르샤바에서 키이우까지 약 790㎞. 직선거리로는 9시간 반 거리지만 검문소 검색에 드는 시간 때문에 14시간 가까이 걸렸다. 우크라이나인들을 가득 태운 이 버스에 이제 난민은 없었다. 도착한 이들은 어느새 ‘시민’으로 변해 각자의 삶터로 흩어져 갔다.

키이우(우크라이나)/글 노지원 기자 zone@hani.co.kr 사진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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