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 잘루지니 우크라이나군 총사령관이 26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우크라이나가 동부 격전지에서 결국 요충지를 내주고 퇴각했다.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시작된 전쟁이 머잖아 만 2년을 채우는 가운데, 서방의 ‘지원 피로감’으로 도움의 손길이 눈에 띄게 줄면서 향후 전황이 그다지 밝지 않아 보인다.
발레리 잘루지니 우크라이나 총사령관은 26일 기자회견에 나서 러시아가 동부 요충지인 마리인카를 점령했음을 인정했다. 그는 “(군이) 지금 마리인카 외곽으로 이동했다. 이 도시는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전날까진 아직 군이 현지에서 저항을 이어가고 있다는 입장이었지만, 하루 만에 후퇴를 인정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잘루지니 총사령관이 밝힌 대로 도시 외곽으로 물러나 새 방어선을 구축한 상태다. 그는 “지금 상황은 정확히 (러시아가 지난 5월 손에 넣은) 바흐무트 때와 똑같다”며 “길과 블록마다 우리 군은 표적이 되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가을 동부 전선에서 대반격에 성공한 뒤 줄곧 공세를 이어왔지만, 이날 마리인카를 내주며 수세로 돌아서는 모습을 보였다.
이번 마리인카 전투는 러시아의 전술을 잘 보여준다. 병력·탄약의 우위를 바탕으로 엄청난 수의 사상자를 감수하며 대규모 병력을 쏟아붓는 것이다. 러시아군은 비슷한 방식으로 인근 도시 아우디이우카를 점령했고, 앞으로 쿠라호베·부흘레다르·포크로우스크 등 주변 마을로 공세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을 차지하면 돈바스(루한스크주와 도네츠크주) 전체를 점령하겠다는 목표에 한층 가까워질 수 있다.
러시아의 공격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지원이 줄어드는 가운데 나왔다. 서방 국가들의 우크라이나 지원 상황을 추적하고 있는 독일 ‘킬 세계경제 연구소’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방국의 신규 재정·인도주의·군사 원조 약속 금액이 올해 8∼10월 21억1천만유로(약 3조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162억유로·약 23조1천억원)에 비해 그 규모가 87%나 줄었다고 밝혔다. 미국 의회는 지난 19일 올 연말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새 군사 지원 약속이 담긴 추가 예산안 의결을 포기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27일 가장 지원이 준 품목으로 155㎜ 포탄을 지목했다. 우크라이나군은 올여름엔 한달에 20만발 이상의 포탄을 소비했지만 현재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양을 사용하고 있어 작전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방공 미사일 재고도 줄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 11일 저녁 전문가들과의 만남에서 수도 키이우를 지키기 위한 방공 미사일이 “한 줌”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견줘 러시아는 포탄·미사일 등 군수물자의 생산을 늘리고 이를 배치하는 데 속도를 내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주요 7개국(G7)의 익명의 군 소식통을 인용해 러시아가 내년 봄∼여름 동안 우크라이나에 탱크 1천대 이상을 보낼 것이라고 전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서구의 신속한 군사 지원을 거듭 촉구하는 한편, 추가 병력 모집에 나섰다. 이들은 25일 징집 연령을 기존 27살에서 25살로 낮추는 내용의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우크라이나군은 러시아에 맞서려면 무려 5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동원이 필수적이라는 입장이다.
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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