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현지시각) 폴란드 메디카 국경 검문소를 가족과 함께 방금 넘은 한 어린이가 취재진의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메디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크라이나-폴란드 국경엔 밤이 없다.
6일 밤(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서부와 폴란드 동부를 잇는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서 만난 자원봉사자 마테우스(24)는 “전쟁이 잠을 자지 않으니 국경의 불도 꺼지지 않는다. 하루 종일, 밤낮없이 난민들이 국경을 넘어온다”고 말했다.
전쟁을 피해 국경을 벗어나려는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은 기차나 자가용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할 수 없으면, 그냥 두 발로 걸어 국경을 넘는다. 특히 메디카 검문소는 교통수단 없이 걸어서 올 수 있어 인파가 몰린다.
“전쟁이 잠을 자지 않으니, 국경엔 밤도 없어요”
검문소 주변에서 할머니를 기다리던 한 우크라이나 여성은 “기차표를 사려고 줄을 서지도 못한대요. (우크라이나 쪽) 역에 사람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대요. 할머니가 결국 걸어서 오기로 했어요”라고 말했다.
폴란드 경찰은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이 넘어오는 메디카 국경 검문소에서 1~2㎞ 떨어진 지역에서부터 차량 통제를 했다. 일반 차량은 검문소 가까이 진입할 수 없다. <한겨레> 취재진 역시 차에서 내려 검문소를 향해 15분쯤을 걷자, 저만치 ‘유모차 행렬’이 검문소 밖으로 줄줄이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6일(현지시각) 오후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를 넘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짐을 실은 유모차를 밀면서 이동하고 있다. 메디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6일(현지시각) 오후 폴란드 메디카 국경검문소를 넘은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걸어서 이동하고 있다. 메디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유모차엔 아이 대신 피난을 위한 짐 더미가 실려 있다. 한 엄마는 한쪽 팔로 동글동글한 털 뭉치 모자를 쓴 아기를 안아 올리고 다른 팔로 유모차를 밀었다. 유모차 손잡이 한쪽엔 주렁주렁 가방이 다른 쪽엔 커다란 비닐봉지들이 걸렸다. 당장 필요한 기저귀, 옷가지, 물 등 생필품들이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18~60살 남성에게 총동원령을 내린 탓에 피난민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들이다. 아빠, 삼촌, 오빠들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고향에 남아 있다. 폴란드 국경수비대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이후 8일까지 폴란드로 입국한 피난민은 모두 120만명인 것으로 집계된다. 마테우스는 “남성들이 자녀와 배우자를 국경까지 데려다주고 본인은 돌아가는 걸 많이 봤다”고 말했다.
끝없는 유모차, 유모차…비닐봉지에 담은 짐 주렁주렁
검문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막 입국 수속을 마친 우크라이나 사람들이 두세명씩 무리 지어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고 다른 손에는 짐가방을 끌며 무거운 걸음을 내디뎠다.
싸늘한 날씨 탓인지 털모자를 쓰고, 패딩 점퍼를 입고, 목도리까지 칭칭 감았다. 애든 어른이든 코와 볼이 빨갰다. 이 검문소에서 우크라이나로 넘어가는 국경선까지 채 200m가 되지 않는데, 꼼꼼하게 입국 수속을 밟는 탓인지 줄은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환한 대낮에 검문소에 닿았지만, 피난민들이 국경을 통과하는 것을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됐다.
6일(현지시각) 저녁 폴란드 메디카 국경 검문소를 통과한 우크라이나에서 온 딸과 손주들을 할머니가 반기며 함께 이동하고 있다. 메디카/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전쟁을 피해 어렵게 폴란드 땅을 밟은 이들을 가장 처음 맞이하는 것은 피난민들을 위한 쉼터다. 폴란드를 중심으로 유럽과 세계 각지에서 파견된 비영리 단체들이 각각 텐트와 테이블을 꾸려 국경을 넘은 이들을 위해 밥을 짓는다.
이들이 운영하는 쉼터엔 조명을 켜고 밥을 짓기 위한 간이 발전기 소리가 무겁게 깔렸다. 쉼터 주변엔 추위를 피하기 위해 피난민들이 곳곳에서 피워대는 장작불로 환히 빛났고, 나뭇가지와 쌓인 종이 박스를 태우는 냄새, 음식 냄새로 가득 찼다.
피난민의 행렬이 요일을 가리지 않고 하루 24시간 내내 이어지다 보니, 메디카 난민 쉼터엔 정해진 식사 시간도 버스 시간표도 없다. 배고픈 사람은 언제든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앉을 곳이 마땅치 않으면 서서 먹어야 한다. 난로가 있어서 추위를 피할 수 있는 텐트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자칫 한눈을 팔거나 넋을 놓고 있으면 예고 없이 도착하는 버스를 놓칠 수도 있다.
피난민들을 태우는 버스는 24시간 내내 운영된다. 막차와 첫차 시간이 따로 없지만 지금 이 버스를 놓치면 언제 다음 버스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쉼터라 해도 서늘한 날씨 탓에 몇시간만 머무르면 발이 얼고 손이 곱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크라이나인들을 맞이하는 유럽 각국의 따뜻한 모습이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4일 코르초바 국경검문소를 찾아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폴란드는 2015~2016년 시리아 난민 위기 때는 난민 수용에 강한 거부감 드러냈었다.
유럽연합(EU)은 3일 내무장관 회의를 열어 우크라이나 난민들에게 일반적인 난민 신청 절차를 생략하고 유럽연합 내에서 취업을 할 수 있고 아이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조처를 마련하는 데 합의했다. 영국도 7일 우크라이나 난민들이 영국에서 피난 생활을 하는 동안 영국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우크라이나 가족 계획’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메디카/노지원 기자
zo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