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반전 시위에서 한 시민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살인자라고 써진 팻말을 들고 있다. 부다페스트/AP 연합뉴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지역에서 민간인을 집단 학살했다는 증거들이 나오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비롯한 러시아의 전쟁 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된다. 하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정상을 단죄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국제사회 전체를 상대로 중대한 범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하는 기관은 2002년 로마규정에 따라 설치된 국제형사재판소(ICC·이하 재판소)이다. 재판소는 집단살해(제노사이드), 인도에 반한 죄, 전쟁 범죄, 침략 범죄 등 네가지 범죄를 심판한다. 재판소는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초기 러시아의 폭격으로 민간인 사상자가 속출하자 지난달 3일 러시아의 ‘전쟁 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 혐의에 대해 조사에 착수했다.
러시아가 키이우 인근에서 퇴각한 직후인 지난 2일 <아에프페>(AFP) 통신 등이 부차 등 외곽 도시에서 현장 취재를 시작하며 또 하나의 범죄 혐의가 추가됐다. 민간인으로 보이는 수십명의 주검이 부차의 거리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습이 발견되며, 러시아군이 ‘집단살해’를 저지른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3일 미국 <시비에스>(CBS) 방송에 출연해 “이것은 제노사이드”라고 규탄했다.
재판소가 다룰 수 있는 네가지 범죄 가운데 ‘침략 범죄’는 이와 관련한 별도의 협약을 비준한 국가에만 적용된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비준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소의 관할 대상이 아니다. 유엔 안보리 결의로 재판소가 조사를 진행할 수 있지만,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비토(거부)할 것이 분명하다.
나머지 세개의 범죄에 대해선 재판소의 판단에 따라 조사를 벌일 수 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을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재판소 법정에 세워 재판을 거쳐 처벌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다.
우선, 러시아는 재판소 회원국이 아니어서 집행력이 미치지 못한다. 러시아 정부가 자국 대통령과 군 주요 인사를 조사하려는 시도에 협조할 가능성도 없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더구나 “전쟁 범죄 사건은 대부분 최고 정치 지도자보다는 현장 지휘관들 선에 머문다”고 지적했다. 재판소가 현직 국가 정상을 기소한 것은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와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 두 사례뿐이다.
그럼에도 재판소가 독자 조사를 통해 증거를 확보하면 푸틴 대통령을 전쟁 범죄 등의 혐의로 기소할 수는 있다. 하지만 재판이 진행되려면 푸틴 대통령이 법정에 출석하거나 그를 체포해야 한다. 이론적으로, 푸틴 대통령이 재판소 회원국을 방문했다가 체포되어 신병이 인도되거나, 러시아에 새 정권이 들어서 푸틴 대통령을 재판소 법정으로 넘긴다면 단죄가 가능하다. 두 시나리오 모두 단기적으로 현실화되긴 힘들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3일 <시비에스> 인터뷰에서 “저들을 적절히 처벌하는 것은 달성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좀 더 긴 시야에서 이번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국제형사재판소 당사국 총회 의장을 지낸 권오곤 변호사는 <한겨레>에 “국제 범죄에는 시효가 없다”며 캄보디아 크메르루주 정권의 킬링필드 학살이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신유고연방 대통령의 인종청소 행위도 당사자가 권좌에서 물러난 뒤 국제 재판이 이뤄진 점을 환기했다. 권 변호사는 “푸틴도 언젠가 처벌받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며 “당장 실효성은 없더라도 긴 호흡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황준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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