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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특별재판부, 받아들여야 한다 / 여현호

등록 2018-11-01 17:36수정 2018-11-01 18:55

여현호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경북 안동 학봉종택에는 학봉 김성일이 1585~86년 나주 목사 때 작성한 노비소송의 ‘입안문’(판결문) 4점이 전시돼 있다. 그중 ‘이지도와 다물사리 사건’ 입안문에, 피고 다물사리가 살던 영암군에 ‘소지’(소장)가 제출됐다가 원고 요구로 이웃 나주 목사 김성일에게 사건이 이송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지도 쪽은 다물사리의 사위 구지가 영암군의 ‘유력자’이며, 영암군의 아전과 짜고 일을 벌였다고 주장했다. ‘송관’(재판관)도 아닌 그 주변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재판부를 바꿔달라는 이지도의 ‘귀구’(법관 기피)는 전라감영에서 받아들여졌다. 430년 전에도 ‘재판의 공정성’ ‘공정하다고 믿을 만한 외관’은 중요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어떨까.

머지않아 시작될 ‘사법농단’ 재판에는 기피하고 제척해야 할 법관이 수두룩하다.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지금까지 80~130명 정도의 판사가 사법농단 의혹으로 조사나 수사를 받았고, 이들 중 상당수가 1·2심 재판을 맡을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에 있다고 한다. 수사 대상이 아니라도 법원행정처나 재판부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관련자들을 ‘모셨던’ 판사도 여럿이다. 물론, 두 법원의 형사합의부 모두에 그런 판사들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재판부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조선 시대 기준으로도 재판부를 바꿀 이유가 된다.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도 있다. 최근 서울고법의 몇몇 부장판사가 공개적으로 검찰 수사를 비판하고 나섰다. 수사 절차나 적용 법리를 문제삼지만, 무죄 판결을 주문하는 등 대놓고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는 언급이 많다. 몇몇은 양 전 대법원장 등 관련자와 가까운 사이이고, 또 누구는 검찰의 수사 대상이다. 뭉뚱그리자면, 피의자나 피의자의 직장 동료들이 재판 시작 전부터 재판에 영향을 끼치려고 로비를 하는 꼴이다.

지금도 이런데, 재판부가 정해지면 ‘주변’의 압력과 설득, 회유는 더할 것이다. 담당 판사도 동료들의 일이고 동료들의 말이니 흔들리기 쉽다. 지금 방식으로 사법농단 사건의 재판부를 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래서 이미 차고 넘친다. 기실, 기존의 무작위 배당도 판사들이 특정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을 때에나 공정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제척해야 할 법관이 한둘이 아니고 찾기도 쉽지 않다면 통상의 사법시스템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특별재판부 도입은 그래서라도 불가피하다. 제척 사유를 확대하고 투명한 추천 과정을 거친 특별재판부라도 있어야, 그나마 공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수 있다. ‘누구도 자기 사건의 재판관이 될 수 없다’는 중세 시민법 때부터 확립된 대원칙이자, 헌법 이전의 ‘자연적 정의’다. 그런 상황을 피하려는 특별재판부가 위헌이라는 비판은, 원칙으론 옳은 대목이 있을 수 있어도 지금의 비상 상황에선 되레 생뚱맞다. 법원이 판사들 가운데 특별재판부를 구성하고, 국회는 판사 추천위의 위원 일부만 천거하도록 하자는데도 ‘삼권분립 원칙 위배’라고 비난하는 것도 가짜뉴스에 가깝다.

어쩌면 지금이 법원에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경쟁사회의 상위 0.01% 우등생인 판사들이 자신들만의 세계에서 당연하게 누려오던 권위와 기득권은 사법농단 사태를 계기로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사법농단의 위헌적 범죄를 죄 아니라고 강변해왔기에 이제 와서 절차적 정의와 법리를 내세운들 귀담아듣는 이가 많지 않다. 커질 대로 커진 불신을 해소하려면 비상한 결단이 필요하다. 지금 그 결단은 특별재판부 수용이다.

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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