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논설위원
상산고 학생 350명 중 275명이 의대에 간다는 전북도교육감의 발언은 학교의 ‘부풀리기 숫자’ 게시가 발단으로 보인다. 그런데 웃지 못할 일은 고교 진학 카페나 학원가에선 “정시 위주 상산고는 학종 시대에 뒤떨어진다. 그 정도 현역 숫자는 웬만한 자사고들도 된다”는 식의 말도 돈다는 것이다. 한쪽에선 ‘의대 사관학교’라고 비난하는데 한쪽에선 ‘의대 숫자’만이 관심이다.
이 모순된 풍경에 자사고 문제, 깊게는 한국 교육개혁의 어려움이 집약돼 있다. 아무리 학비가 일반고의 3배요, 전체 학부모부담금이 대학 등록금보다 높다 해도 무리해서 감당하겠다는 사람, 줄 섰다. 1점 차로 갈리는 대학 간판이 평생의 직업과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는데, 좀더 나아보이는 공부 환경을 마다할 부모가 있을까. 이들이 모두 피라미드 꼭대기만 바라보는 ‘스카이캐슬’ 계층도 아니다. 상산고를 ‘교육적폐’라 하거나 자사고 옹호론자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일이 부질없게 느껴지는 이유다.
지난달 20일 전북도교육청 앞에 조화를 놓고 상산고 학부모들이 항의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높은 대입성적은 애초 성적 우수자들이 모인 덕이 크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지난 2월 김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분석을 보면, 상산고 같은 전국단위 자사고 6곳은 중학교 내신 성취도가 A등급인 학생 비율이 단 한곳을 빼고 97.4~99.4%에 달했다. 석차백분율로 파악한 다른 3곳은 중학교 상위 10% 학생 비율이 평균 88%였다. 서울 일반고의 평균이 8.5%니 10배가 넘는다. 서울의 일반자사고는 추첨·면접만 하는데 이 비율이 18.5%다. 법도 아니고 시행령에 공교육 보완을 위해 ‘한시적’ 존재로 명시됐던 자사고가 이 정도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누려온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잘하는 아이들끼리 있어야 잘한다’는 평범한 인식에서 출발한 수월성 교육에 대한 환상 탓 또한 크다고 본다. 자사고 논란이 늘 수월성과 형평성의 기계적 대립을 맴도는 배경이기도 하다.
교육선진국이라고 그런 고민이 없던 건 아니다. 1960년대 말부터 수십년간 교육개혁을 펼친 ‘평등교육’의 대명사 핀란드도 1985년까지 우열반이나 수준별 과정은 일부 남아 있었다. 이를 전면금지할 당시 ‘사회적 평등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개성을 억압하고 인재를 위한 교육자원을 낭비시킨다’는 반발도 상당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류선정 ‘한국-핀란드 교육연구센터’ 소장은 “다양한 능력의 아이들이 섞여 있을 때 학업성취도도 더 높아진다는 연구가 있었다. 핀란드인들의 마음이 좋아서가 아니다. 차별 없는 예비시민으로 자라는 게 장기적으로 사회 역량에 도움이 된다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한국 학생들은 19살이 되면 이미 지치고 우월감과 열패감으로 나뉜다. 반면 핀란드 학생들은 뒷심을 발휘한다”고 말했다. 핀란드는 2000년대 국제학생성취도평가(PISA)에서 잇단 1위를 하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하지만 그는 핀란드 교육을 우리 식 ‘형평성’에만 초점 맞춰 보는 것도 오해라고 했다. “우리 잣대라면 공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수업은 교사 자율이고 평가도 옆의 반, 옆의 학교 다 다르다. 수준이 높은 아이에겐 맞는 도움을 준다. 작은 차이는 교사의 전문성을 믿고 맡기는 거다.” 대신 국가는 이민학생이 많은 학교, 특수교육대상이 많은 학교, 교외지역 학교 등 유형별로 샘플을 뽑아 평가하고, 성취도가 떨어지는 유형의 학교들을 집중지원한다.
지난 4월 헌법재판소가 자사고의 동시선발을 합헌으로 판단할 때, 위헌의견을 낸 재판관들은 “일반고 경쟁력을 강화해야 하는데 손쉬운 자사고 규제를 택해 전체 고교를 하향평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나 또한 설령 42개 자사고가 다 전환돼도 1550여 일반고 경쟁력이 절로 생긴다고 믿진 않는다. 자사고의 국영수 선행학습이 아닌, 다른 자율성이 더 많이 필요하다. 국가교육과정을 채우는 것만으로 버거운 학교에서 미래의 경쟁력이라는 창의성과 혁신성은 기대할 수 없다. 단기적으로 성적은 안 좋을지 모른다. 시행착오 가능성은 인정해야 한다.
류 소장은 “한국의 교육전문가들은 ‘사회가 이런데 교육이 바뀌겠냐’는 말을 자주 하더라. 한국에서 대학 나오고 증권사를 다녔지만 늘 난 1등 외엔 동기부여가 없었다. 수월성과 형평성에 정답은 없다. 그래도 핀란드에서 다른 상상력을 봤다. 훨씬 똑똑하고 열정적인 한국인들은 그 기간을 앞당길수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2358개 고교 하나하나가 특별한 나라. 이 긴 과정의 어려움을 인정하면서도 설득하고 책임질 교육지도자의 비전과 용기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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