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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이재용의 진짜 승부수 / 곽정수

등록 2020-06-04 17:26수정 2020-06-05 02:09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2월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3회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12월6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국정농단 파기환송심 3회차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너무 힘들다. 벌써 몇년째인가?” 삼성의 탄식이 곳곳에서 들린다. 총수인 이재용 부회장이 다시 기소 위기에 처했다. 이번에는 삼성물산-제일모직 불공정 합병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이다. 2017년 2월17일 경영승계를 위해 국정농단 세력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구속된 지 3년3개월여 만이다.

이 부회장은 검찰 기소의 타당성을 살펴달라며 시민들로 구성된 검찰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신청했다. 재벌 총수로는 처음이다. ‘승부수’인 셈이다. 검찰도 이에 맞서 4일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장군멍군식 공방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삼성 사태의 본질 문제도 놓쳐서는 안 된다. 재벌체제의 핵심은 경영세습, 총수(오너)의 ‘황제경영’, 사업 다각화, 외형 중심 경영이다. 이 중 사업 다각화와 외형 중심 경영은 외환위기의 태풍에 날아갔다.

20여년 만에 재벌은 더 큰 전환점을 맞고 있다. 난공불락 같았던 경영세습과 황제경영에도 균열이 시작됐다. 이 부회장은 5월 초 대국민사과에서 4세 세습 포기를 선언했다. 80여년 재벌 역사에서 삼성 같은 최상위 재벌의 경영세습 포기 선언은 최초다.

또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은 2019년 3월 대한항공 주총에서 이사 연임에 실패했다. 주인 행세를 하던 총수가 자기 회사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 역시 초유의 사태다.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거대한 댐의 붕괴도 작은 구멍에서 시작한다.

그동안 재벌개혁의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답답해하는 국민이 많았다. 그러나 불합리한 경영세습과 황제경영에 기반한 재벌체제가 한계점에 왔다는 징후가 분명해지고 있다. 오히려 재벌 스스로 변화를 위해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고민할 시점이다. 자칫 총수 사법처리 방어나 경영권 유지에 급급해하며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갑자기 사라진 ‘공룡’ 같은 신세가 될 수 있다.

재벌체제가 무너져도 총수 일가만 사라질 뿐 기업은 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 때처럼 기업이 죽을 수도 있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새로운 소유지배구조를 서둘러 찾아야 한다. 문제는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나라마다 법·제도와 문화가 다르듯이 각자가 해법을 만들어야 한다.

독일의 자랑인 ‘히든 챔피언’(강소기업)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만하다. 운 좋게도 현지에서 직접 취재할 기회가 몇차례 있었다. 히든 챔피언의 역사는 19세기 중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모두 오너(가족)경영에서 출발했지만, 100년 이상 지나면서 매우 다양한 경영 형태로 분화됐다. 오너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 그리고 그 중간 성격인 다양한 변종이 혼재한다.

주목할 것은 오너경영의 요소가 남아 있는 히든 챔피언이 지닌 공통점이다. 바로 합리적인 승계시스템이다. 가전업체인 밀레는 120년 전 두 가문이 공동창업했다. 창업 가문에서 1명씩만 경영에 참여해서 공동대표를 맡는다. 후계자는 엄격한 훈련과 검증을 거쳐 선정된다. 황제경영과도 거리가 멀다. 이사회는 창업 가문 대표 2명과 전문경영인 3명으로 구성된다. 이사 5명의 의사결정권은 동등하다. ‘창업 가문과 전문경영인의 파트너십 경영’이다.

히든 챔피언의 소유지배구조 변화가 본격화한 시점은 창업 3~4세 때다. 이유는 “경영 능력이라는 유전자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서 찾을 수 있다. 밀레와 같은 고민 없이 오너경영만 고집한 히든 챔피언은 모두 사라졌다. 한국 재벌도 3~4세 시대를 맞았다. 창업자 후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능력 검증도 없이 세습을 하고, 여러 가족이 동시에 기생충처럼 회사의 단물을 빨아먹는 행태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2015년 6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논란이 뜨거울 때다. <한겨레>는 언론사 중 거의 유일하게 합병 비율이 이 부회장의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정해진 문제를 집중 조명했다. 삼성 고위 임원이 보자고 연락이 왔다. “논란이 큰데 꼭 합병을 강행해야 하느냐. 일단 취소하고 불공정 소지를 없앤 뒤 재검토하라”고 고언했지만 콧방귀를 뀌었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한겨레>의 고언을 조금이라도 귀담아들었다면, 이 부회장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진짜 승부수는 지금 필요하다.


곽정수 ㅣ 논설위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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