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숙/소설가
희망나무 /
장마철의 버스 안은 사람들의 체온과 땀냄새와 눅눅한 습기 때문에 후텁지근합니다.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 때문에 버스 바닥은 질척거리고 미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버스에 오른 미연은 비어 있는 맨 뒷좌석에 앉습니다. 앞쪽에 앉았다가는 노인들에게 금세 자리를 양보해야 했으니까요. 50분이나 걸리는 회사까지 서서 간다는 것은 아침부터 진을 빼는 일입니다.
엠피3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임형주의 ‘샐리가든’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좀 나아집니다.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버스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안타까운 수해소식이 들려옵니다. 청과물시장 앞에 버스가 서자 커다란 채소 보퉁이를 안은 할머니가 힘겹게 버스에 오릅니다. 이 장마철에도 길거리에서 채소를 팔아야만 하는 채소행상 할머니가 안 되어 보입니다.
“혹시, 만 원짜리 하나 바까 줄 사람 없습니꺼?”
밭일이라도 하다 온 것 같은 차림새인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스 안을 휘둘러봅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버스 요금이 900원인데 만 원짜리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잔돈을 바꾸어주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자 버스기사는 라디오를 끄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잔돈이 있으면 좀 바꿔 주세요.”
그 소란스럽던 버스 안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금세 조용해집니다. 미연의 건너편에 앉은 뚱뚱한 아저씨가 지갑을 꺼내어 살펴보지만 바꾸어 줄 돈이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미연의 지갑 속에는 카드 한 장과 삼만 육천 원과 동전 몇 개가 들어 있을 뿐입니다. 할아버지가 한참 동안 버스 안을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있을 때였지요.
“할배요, 이거 받으소.”
할아버지 건너편에 앉은 채소행상 할머니가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할아버지에게 내밉니다.
“됐심니더. 공짜로 남의 돈을 우예 받겠는교? 돈이 없는 것도 아이고.”
“괜찮다 케도 카이께네, 받으시이소.”
“할배요. 그카지 말고 받으시이소. 다음에 이 할매 만나마 커피 한 잔 사마 안되는교?”
채소행상 할머니의 뒷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거들자 버스 안에는 와르르 웃음이 터집니다. 아마도 할머니에게는 그 천 원이 작은 돈이 아니었을 거라고 미연은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못내 미안해하며 그 돈을 받아 버스요금을 냅니다. 운전대를 잡은 버스기사의 얼굴에도, 승객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납니다.
채소행상 할머니가 건넨 천 원짜리 한 장이 마술을 부린 걸까요. 눅눅하던 버스 안이 햇빛이 스며든 것처럼 금방 환하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옥숙/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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