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할배요, 이 천원으로 버스비 내이소”

등록 2006-07-25 18:51수정 2006-07-26 15:00

김옥숙/소설가
김옥숙/소설가
희망나무 /

장마철의 버스 안은 사람들의 체온과 땀냄새와 눅눅한 습기 때문에 후텁지근합니다.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 때문에 버스 바닥은 질척거리고 미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버스에 오른 미연은 비어 있는 맨 뒷좌석에 앉습니다. 앞쪽에 앉았다가는 노인들에게 금세 자리를 양보해야 했으니까요. 50분이나 걸리는 회사까지 서서 간다는 것은 아침부터 진을 빼는 일입니다.

엠피3에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임형주의 ‘샐리가든’을 듣고 있자니 기분이 좀 나아집니다. 비는 쉴 새 없이 내리고 버스 안에 틀어놓은 라디오에서는 안타까운 수해소식이 들려옵니다. 청과물시장 앞에 버스가 서자 커다란 채소 보퉁이를 안은 할머니가 힘겹게 버스에 오릅니다. 이 장마철에도 길거리에서 채소를 팔아야만 하는 채소행상 할머니가 안 되어 보입니다.

“혹시, 만 원짜리 하나 바까 줄 사람 없습니꺼?”

밭일이라도 하다 온 것 같은 차림새인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스 안을 휘둘러봅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버스 요금이 900원인데 만 원짜리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잔돈을 바꾸어주겠다는 사람이 나서지 않자 버스기사는 라디오를 끄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잔돈이 있으면 좀 바꿔 주세요.”

그 소란스럽던 버스 안이 얼음물을 끼얹은 것처럼 금세 조용해집니다. 미연의 건너편에 앉은 뚱뚱한 아저씨가 지갑을 꺼내어 살펴보지만 바꾸어 줄 돈이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미연의 지갑 속에는 카드 한 장과 삼만 육천 원과 동전 몇 개가 들어 있을 뿐입니다. 할아버지가 한참 동안 버스 안을 이리저리 휘둘러보고 있을 때였지요.

“할배요, 이거 받으소.”

할아버지 건너편에 앉은 채소행상 할머니가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할아버지에게 내밉니다.

“됐심니더. 공짜로 남의 돈을 우예 받겠는교? 돈이 없는 것도 아이고.”

“괜찮다 케도 카이께네, 받으시이소.”

“할배요. 그카지 말고 받으시이소. 다음에 이 할매 만나마 커피 한 잔 사마 안되는교?”

채소행상 할머니의 뒷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거들자 버스 안에는 와르르 웃음이 터집니다. 아마도 할머니에게는 그 천 원이 작은 돈이 아니었을 거라고 미연은 생각합니다. 할아버지는 못내 미안해하며 그 돈을 받아 버스요금을 냅니다. 운전대를 잡은 버스기사의 얼굴에도, 승객들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가 피어납니다.

채소행상 할머니가 건넨 천 원짜리 한 장이 마술을 부린 걸까요. 눅눅하던 버스 안이 햇빛이 스며든 것처럼 금방 환하게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옥숙/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