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성 교사의 인문 사회 비타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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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좋은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다. 생산의 양적 증가와 질적 상승 효과를 가져온 자본주의는 다른 한편으로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우선, 물질적 가치의 생산 증대만을 지나치게 중시하다 보니,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황금 만능주의의 풍조가 나타나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상품이나 화폐, 자본 등의 물질이 마치 고유의 힘을 지니고 있어서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믿고, 그것을 신앙 내지 숭배의 대상으로까지 여기는 물신 숭배(物神崇拜)의 경향조차 나타나게 되었다.―<윤리와 사상>(교육인적자원부) 177쪽
컴퓨터를 통해서 접하게 되는 인간 관계는, 실제 인간들 간의 관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간접적인 관계이다. 그 관계는 전 인격적인 관계라기보다는 부분적·기능적인 관계가 된다. 더 나아가 컴퓨터 화면에서만 살아 있는 사이버 인물을 만들고, 그것을 마치 살아 있는 한 인간처럼 생각하고 대우해 주게 된다면, 가상적인 인간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간접적, 가상적 인간 관계를 실제 관계보다 더욱 중요시하거나, 그로 인하여 실제 관계가 제약을 받게 될 때에 인간 소외와 비인간화의 문제가 청소년 사이에서 생겨나게 된다.―<도덕>(교육인적자원부) 50쪽
논제 찾아 생각하기
거울을 보다 갑자기 자기 자신이 낯설어진 적이 있지? 내가, 내가 아닌 남으로 보인 적이 있을 거야.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문득 자신이 남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을 거고.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려 굴러가는 이 거대한 사회에서 자신이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개를 떨군 적도 많을 거야. 그래서 스스로를 골방에 집어넣은 적이 있을지 몰라.
이런 감정을 소외감이라고 해. 경험 과학적 견지에서는 소외를 이렇게 주관적인 심리로 보지. ‘환경에 동화 또는 적응하지 못하는 개인의 주관적 심리 상태’가 소외라는 거야. 사실 동일한 환경에 있을지라도 누구는 그것을 의식하고 누구는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설령 동일한 감정을 느꼈다 하더라도 행동이 서로 다르게 표출될 수도 있어.
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괜히 ‘개인’이 과민해서 고독감이나 단절감을 느끼는 게 전부일까? 물론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야. 우리네 일상을 살펴보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알게 모르게 따돌리는 경우가 더 많아. 멀리 갈 것도 없어. 우리가 생활하는 교실을 한번 떠올려 봐. 돈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가 사실 있잖아. 그런 이유로 친구를 따돌리는 녀석들, 참 못됐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외의 주범은 그 ‘못된 녀석’이 아니야. 어떤 친구가 돈이 없어서 따돌림을 받았다면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돈’이야. 돈이 없어서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친구 관계가 돈에 좌우되는 사회가 그 배후에 버티고 있다는 말이지. 이처럼 모든 인간 관계를 파고들면 그 속에는 무엇인가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인간 관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결과 소외라는 문제가 발생해. 소외는 ‘주관적 심리’가 아니라 ‘객관적 상황’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사실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소외의 객관적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에 반영되어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야. 현대 소외론의 효시가 된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을 살펴볼까? 여기에서 ‘사물화’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현상이야.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그야말로 상품 생산이 전면적으로 관철되는 사회이지. 인간 개개인은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 만큼의 가치를 갖는 상품을 생산하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는 거야. 이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상품화요, 인간 관계가 사물 관계로 전락하는 것이며, 결국 주체성의 상실이자 자기 소외이지. 하지만 이 이론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 인간이 소외당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거든. 그래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프랑크푸르트의 비판 철학자들은 소외를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파악해. 발달한 기계 장치와 거대한 관료 조직, 그리고 강력한 권위주의를 제도화한 현대 산업 사회가 바로 소외의 주범이라는 거야. 그들이 보기에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관료 조직의 성장으로 인간은 일종의 로봇이 되었어.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이자 조직의 일원으로, 기계가 명령하고 조직이 움직이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존재이지. 그렇다면 이런 소외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개인의 탈소외’와 ‘사회의 탈소외’는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해. 개인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가 반드시 행복한 유토피아가 되는 것은 아니고, 사회를 개혁한다고 해서 모든 개인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거든. 따라서 개인의 탈소외와 사회의 탈소외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해. 개인의 소외감 극복에만 치우치면 사회의 병리 현상을 외면하기 쉽고, 구조적인 모순의 척결만을 강조하면 개인의 심성 변화에 둔감하기 쉽거든.
인간 소외의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이 사회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데 있어. 가장 중시되어야 할 것이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주변으로 벗어나 있고, 대신 기계와 상품, 권력과 제도 등이 그 중심을 차지한 데서 인간 소외가 비롯되었지. 이를 해결하려면, 주변으로 밀려난 인간을 다시 중심으로 불러들이는 일이 급선무야. 여기에 필요한 것이 휴머니즘이지. 우리의 생활과 사고의 중심에 인간을 근본으로 생각하고 중시하는 태도를 지녀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교과서와 함께 구술·논술 뛰어넘기> 저자, 여수여고 교사
위 논제와 관련된 기출문제(2001학년도 한양대 정시 논술 문제)는 인터넷 한겨레(www.hani.c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괜히 ‘개인’이 과민해서 고독감이나 단절감을 느끼는 게 전부일까? 물론 그런 경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야. 우리네 일상을 살펴보면, 누군가가 누군가를 알게 모르게 따돌리는 경우가 더 많아. 멀리 갈 것도 없어. 우리가 생활하는 교실을 한번 떠올려 봐. 돈이 없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 하나만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친구가 사실 있잖아. 그런 이유로 친구를 따돌리는 녀석들, 참 못됐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소외의 주범은 그 ‘못된 녀석’이 아니야. 어떤 친구가 돈이 없어서 따돌림을 받았다면 문제는 ‘인간’이 아니라 ‘돈’이야. 돈이 없어서 친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친구 관계가 돈에 좌우되는 사회가 그 배후에 버티고 있다는 말이지. 이처럼 모든 인간 관계를 파고들면 그 속에는 무엇인가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 인간 관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 결과 소외라는 문제가 발생해. 소외는 ‘주관적 심리’가 아니라 ‘객관적 상황’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사실이라고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어.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소외의 객관적 상황이 사람들의 의식에 반영되어서 나타난 결과일 뿐이야. 현대 소외론의 효시가 된 루카치의 ‘사물화 이론’을 살펴볼까? 여기에서 ‘사물화’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현상이야.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사회는 그야말로 상품 생산이 전면적으로 관철되는 사회이지. 인간 개개인은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아니라, 얼마 만큼의 가치를 갖는 상품을 생산하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는 거야. 이것은 다름아닌 인간의 상품화요, 인간 관계가 사물 관계로 전락하는 것이며, 결국 주체성의 상실이자 자기 소외이지. 하지만 이 이론은 한계를 가지고 있어. 인간이 소외당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거든. 그래서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마르쿠제 등 프랑크푸르트의 비판 철학자들은 소외를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파악해. 발달한 기계 장치와 거대한 관료 조직, 그리고 강력한 권위주의를 제도화한 현대 산업 사회가 바로 소외의 주범이라는 거야. 그들이 보기에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관료 조직의 성장으로 인간은 일종의 로봇이 되었어. 인간은 기계의 부속품이자 조직의 일원으로, 기계가 명령하고 조직이 움직이는 대로 수동적으로 따르기만 하는 존재이지. 그렇다면 이런 소외를 어떻게 하면 극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개인의 탈소외’와 ‘사회의 탈소외’는 동일한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해. 개인이 소외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가 반드시 행복한 유토피아가 되는 것은 아니고, 사회를 개혁한다고 해서 모든 개인이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거든. 따라서 개인의 탈소외와 사회의 탈소외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해. 개인의 소외감 극복에만 치우치면 사회의 병리 현상을 외면하기 쉽고, 구조적인 모순의 척결만을 강조하면 개인의 심성 변화에 둔감하기 쉽거든.
박용성교사 여수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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