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순필 서울교통공사 노동조합 위원장(왼쪽 둘째)이 20일 오전 서울시청 들머리에서 열린 신당역 사고 피해자 추모와 재발방지 및 안전대책 수립 촉구 기자회견에서 신당역 스토킹 범죄 피해자 추모주간 활동 계획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신당역 스토킹 살인 사건’을 계기로 ‘확정 판결 뒤 사내 징계’ 관행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서울교통공사가 가해자 사내 징계를 확정 판결 뒤로 미뤘는데, 이러한 ‘지연’이 피해자를 각종 2차 피해에 노출시키고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점이 다시 확인됐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사내 징계를 미루는 관행은 기업이 ‘책임 회피’를 위해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행태라고 꼬집었다.
20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교통공사(공사)는 지난해 10월13일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 피의자 전주환(31)을 직위해제했다. 전주환이 불법촬영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통보 받은 지(10월8일) 5일 뒤다. 그뒤 사건 발생 당일인 9월14일까지 11개월 동안 전주환은 쭉 ‘직위해제’ 상태였다. 직위해제는 ‘징계’가 아니다. 징계 수위 확정 전까지 기존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는 조처일뿐이다. 직위해제 상태에서 전씨는 월급과 성과급을 받았고, 사내 인트라넷에도 수차례 접속해 피해자 주소지와 근무지 정보를 빼내 범행에 이용했다.
그러는동안 전씨에 대한 사내 징계 절차는 개시조차 되지 않았다. 공사는 내부적으로 ‘확정 판결 뒤 사내 징계’ 방침을 고수해왔기 때문이다. 보통 1심 판결까지 아무리 빨라도 6개월이 걸리고, 피의자가 항소·상고라도 하면 확정 판결까지 수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동안 피해자는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자신의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해자와도 완전히 차단·분리되지 않은 상황에 놓인다.
‘직장 내 스토킹’ 피해자에게 사내 징계 지연은 특히 더 위험하다. 징계는 미룬 채 가해자를 직위해제 상태에 둔다면 피해자와의 원천적 ‘차단’이 애초에 불가능해진다. 실제 이번 사건에서 전주환은 직위해제 중 피해자 정보에 손쉽게 접근했다. 2차 피해가 발생할 여지도 커진다. 최수영 서울여성노동자회 고용평등상담실장은 “징계가 미뤄진다는 것은 회사가 피해를 인정하지 않은 상태라는 의미다”며 “그렇기에 가해자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여러 소문을 만들어낼 것이고, 피해자는 가해자 또는 가해자 지인의 합의 종용이나 협박 등에 노출되기 쉽다. (징계 지연은) 그 자체로 피해자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신당역 사건 피해자 유족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직원들이 (피해자가) 우리 언니인 줄 모르고 ‘그 사람(가해자) 좋은 사람인데 누가 신고했을까’ 이런 얘기를 했고, 이에 (언니가) 상처 받아 말할 곳이 없었다”고 했다.
공사, 개선 대책 내놓고 “반드시 하겠다는 뜻 아냐”
전문가들은 ‘확정 판결 뒤 징계’ 관행은 기업이 분쟁에서 부담을 덜기 위해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한 행태라고 지적한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은 “사내 절차는 피해자와 조직 구성권의 안전한 노동권 보장을 위한 것으로, 처벌이 주 목적인 사법 절차와는 다른 측면이 있다”면서 “그럼에도 기업이 사내 조치를 사법 판단 이후로 미루는 이유는 반발하는 가해자와의 분쟁 등에서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어적인 태도”라고 했다.김다슬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도 “기업이 (가해자) 징계 판단에 대한 부담을 재판부에 떠넘기면서, 정작 조직 내 성폭력에 대한 논의, 대응 방식이 성숙하지 못하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이런 관행의 문제가 드러났지만 공사는 여전히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앞서 공사는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제출한 ‘안전강화 대책’에서 ‘확정 판결 뒤 징계’ 방침을 ‘1심 판결 뒤 선 징계’로 개선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공사 관계자는 <한겨레>에 “해당 방침은 여러 시나리오 중 하나일 뿐 반드시 (개선)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라며 “(가해자가) 징계 불복해 각종 소송을 제기하는 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정확한 수사 결과를 토대로 징계를 내려야 하기 때문에 여전히 사내 징계는 확정 판결 뒤 하는 게 맞다고 본다”고 했다. 국회에 상황 모면용으로 대책을 제출한 것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공사의 ‘확정 판결 뒤 징계’는 관행일 뿐 내부 규정에 명시된 것도 아니다. 서울교통공사 인사규정을 보면 ‘경찰·검찰 등 수사기관에서 수사 중인 사건은 수사 개시의 통보를 받은 날로부터 징계 의결의 요구 그 밖의 징계 절차를 진행하지 아니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징계 절차 유보를 ‘허용’ 한 것이지, 반드시 확정 판결 뒤로 미루라는 규정이 아니다.
반면 서울시는 지난해 발간한 ‘직장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 피해자를 몰라도 가해 행위를 인지하면 기관이 적극적으로 사내 조사 등 조처를 취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공사는 줄곧 ‘피해자가 회사에 피해 사실을 알리지 않아 자체 조사를 할 수 없었다’는 입장인데, 이런 해명이 설득력이 떨어지는 이유다. 서울교통공사는 서울시의 산하기관이다.
최윤아 기자
a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