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중재요청에서 ‘1300억 지급 판정서’를 받아든 법무부는 고심에 빠졌다. 시민사회에선 분쟁의 계기가 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책임자들에 배상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엘리엇 판정’이 공개된 지 하루가 지난 21일, 법무부는 판정서 공개도, 후속 조처 발표도 하지 않았다. 법무부 관계자는 <한겨레>에 “판정서를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론스타에 2억1650만 달러(약 2857억원) 배상’ 판정이 났을 때 불복 의사를 밝혔던 것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법무부가 이의 신청을 하더라도 판정이 취소될 가능성은 적다. ‘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ISDS)는 ‘중재’ 판정이라 소송과 같은 불복 절차가 없다. 판정 취소 소송을 별도로 청구할 수도 있지만 앞선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어야 하는 등 조건이 매우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책임자들에게 정부가 구상권을 청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국제통상 전문가인 송기호 변호사는 21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해 사적 이익을 취한 것으로 판정문에 드러난 해당 집단과 박근혜·이재용씨에게 구상권 행사를 검토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국가가 먼저 1300억원을 엘리엇에 물어준 뒤 이들에게 ‘배상액을 달라’고 요구하라는 뜻이다. 참여연대도 논평을 내어 “국민이 세금 등으로 마련한 나랏돈이 국민의 복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명목으로 지출되게 됐다”며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이재용 회장과 삼성물산, 박근혜씨,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전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에게 구상권을 청구할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밝혔다.
국가배상법은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는 공무원에게 국가가 구상금을 청구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지난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박 전 대통령이 이 회장의 승계를 위해 ‘묵시적 청탁’을 받아 삼성물산 합병에 개입했음은 2019년 8월 대법원 판결로 확정됐다.
엘리엇 쪽은 “타당한 결론”이라고 환영했다. 20일(현지시각) 입장문을 내어 “이번 중재판정은 아시아에서 주주 행동주의 전략을 취하는 투자회사가 투자 대상국의 최고위층으로부터 기인한 부패한 범죄행위에 대하여 국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최초의 투자자-국가 분쟁 사례”라며 “한국이 중재판정 결과에 승복하고, 중재판정부의 배상 명령을 이행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정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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