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4일 열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제55차 전체위원회에서 베트남 하미 학살 사건 조사 건 각하를 표결하는 모습. 김광동 위원장(가운데)과 여당 추천 위원들이 각하 찬성의 뜻으로 손을 들고 있다. 김 위원장 오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옥남 상임위원, 차기환·장영수 비상임위원. 진실화해위 전체위원회 방청 화면 캡처
김광동 위원장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 손을 흔들고 있다. 나를 봐 달라고, 내가 여기 있다고, 내가 이렇게 잘하고 있다고.
돌이켜 보면 베트남 하미 학살사건 조사 각하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김광동에 의한, 김광동을 위한 한 편의 자작극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이 문제를 진실화해위 제2소위 안건으로 상정해보라고 운을 뗀 사람은 바로 김 위원장이었다. 지난 2월7일 베트남전 학살 피해·생존자가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한 국가배상소송 1심에서 승소한 이후였다. 그는 조사2국 관계자들에게 한 번도 아니고 여러 차례 베트남 건 재상정(2022년에 보류) 검토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미 사건 조사 각하는 계획된 퍼포먼스?
하미 사건 조사 건이 제2소위에서 위원들 간에 2:2로 의견이 갈려 전체위원회로 넘어오게 되자 김 위원장은 ‘사전 조사’ 이야기를 흘리기도 했다. 진실화해위 안팎에서는 김 위원장이 보수층을 의식해 ‘사전 조사’를 절충안으로 선택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각하할 명분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야당 추천 위원들이나 조사 실무자들 사이에서도 최소한 각하는 되지 않으리라는 낙관적 예상이 흘러다녔다. 관련 시민단체 회원들은 조사 개시 압박을 위해 5월24일 전체위원회가 열리는 대회의실 앞에서 손팻말 시위를 했다.
최종 결론은 허망했다. 김 위원장은 전체위원회에서 여야 추천 위원들 간의 논쟁을 지켜보다 깨끗하게 각하로 결론 내렸다. 야당 추천 위원이 동의할 수 없다고 하자 표결을 강행하며 각하 의견에 손을 들었다. 그리고, 당일 저녁 바로 보도자료를 뿌리도록 했다. 보통 조사 개시나 진실규명 보도자료는 전체위원회 다음날 아침 낸다. 각하 건을 따로 내는 경우는 드문 편이다. 안건 상정을 유도하고 사전조사설을 유포해 한껏 기대와 관심을 끌어모은 뒤 바로 걷어찼다. 그리고 각별하게 홍보했다. 김 위원장은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했던 사람들은 뒤통수를 맞았다. 순진했다. 덕분에 김 위원장은 보수층에게 칭찬받을 만한 업적 하나를 세웠다.
2017년 11월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방송문화진흥회에서 MBC 김장겸 사장해임안을 결정하기 위한 이사회를 앞두고 김광동 이사가 입장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MBC 방문진 시절의 김광동
김광동 위원장의 업적이 쌓이고 있다. 한국전쟁 사건을 총괄하는 조사1국장 공개채용에서 국정원 대공수사팀 3급 공무원 출신을 최종합격시켰다.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 중에서는 부역자를 살펴 가리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른바 적대세력(인민군, 지방좌익, 빨치산) 희생자들의 진실규명 보고서에 “국가는 북한 정권에 사과를 촉구해야 한다”는 권고문안을 넣기로 했다. 국가폭력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설립한 진실화해위가 북한을 주로 공격하는 반공 단체의 정체성을 세우는 중이다.
사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행태는 문화방송(MBC)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 시절과 판박이다. 그는 2009년 8월부터 2018년 7월까지 9년간 문화방송 사장 임면권 등을 지닌 방문진 이사를 지냈다. 문화방송에서 ‘방문진 이사 김광동’을 지켜봤던 최승호 <뉴스타파> 피디(전 문화방송 사장)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김광동 같은 인물들이 들어오기 전에는 방문진 내에 격한 이념 갈등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이전에는 여야 추천 이사들이 서로 타협하면서 방문진을 운영해 나갔는데 김광동 이사 등이 오면서 완전히 이념에 기초한 선과 악 대립구도로 노동조합을 악으로 몰아붙였다”는 것이다. 최승호 피디는 “김광동은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했던) 고영주 전 방문진 이사장과 똑같은 인물이라고 보면 된다”고 덧붙였다.
차기 방통위원장 유력한 이동관의 추천
<미디어오늘>의 21일 보도에 따르면, 방송 및 저널리즘 분야에 전혀 문외한인 김광동이라는 인물을 방문진 이사로 추천한 이는 2009년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었던 이동관 대통령실 대외협력 특보였다. 김 위원장의 코드는 이 특보와 잘 맞아 보인다. 이 특보가 뉴라이트(2000년대 중반 등장한 신우파, 주체사상파에서 전향한 우익을 이르기도 함) 인사들을 선호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뉴라이트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문진을 이념투쟁의 장으로 만들었다. 지금 진실화해위에서도 뉴라이트의 진가를 발휘한다. 그를 추천했던 이 특보는 현재 새 방송통신위원회(방통위) 위원장으로 유력시된다.
이동관 방통위원장 체제가 현실화되면 방송을 움켜쥐려는 윤석열 정부의 손아귀 힘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방송 환경이 정권에 유리하게 바꾸는 과정에서 새 방통위원장이 또 뉴라이트 인사들을 중용할 경우, 김광동 위원장이 혹시라도 물망에 오르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진실화해위 내부에서도 “김 위원장이 요즘 어떤 자리를 노리고 오버액션을 하는 게 아니냐” 따위의 소문과 억측이 무성하다. 그렇다면 지금 김 위원장은 눈에 띄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퍼포먼스는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을 신청한 이들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김 위원장이 5월25일 기자간담회에서 현안 과제로 내세운 것 중 하나는 ‘조사기간 연장’이다. 2기 진실화해위 2년간 진실규명 처리된 사건 비율은 35%밖에 안된다. 그러나 법적으로 주어진 위원회 활동 기한은 내년 5월26일.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기간을 1년이라도 더 연장해야 최소한의 신청사건 진실규명 작업과 다른 현안들을 해결할 수 있다. 김 위원장은 과연 이 과제를 위해 나설까?
6월9일 영락교회에서 열린 조찬기도회에서 발언하는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 그는 피해사건 신청자들의 바람보다는 본인의 정치적 퍼포먼스에 더 관심이 있어 보인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
이대로 가면 ‘진실화해위 해체’ 수순
2020년 12월 출범한 2기 진실화해위에 1년간 신청 접수된 총 2만92건 중 한국전쟁기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9957건으로 거의 50%에 이른다. 이렇게 신청 사건의 절반이나 되는 민간인 학살에 관해 김 위원장은 9일 서울 영락교회에서 “전쟁 상태를 평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 군경이 초래한 피해”라고 규정했다. 신청자들에게 노골적으로 반감을 가진 위원장이 굳이 기간 연장을 해서 이들의 피해 구제를 위한 시간을 벌려고 할 지 모르겠다.
김 위원장에게 주어진 임기는 2년(연임 가능). 법에 정해진 위원회 활동기한은 2024년 5월26일이지만 활동 종료 뒤 보고서 작성을 위해 주어지는 6개월을 합치면 내년 11월 말까지다. 2022년 12월 임명된 김광동 위원장 임기 2년을 꽉 채우는 시간이니 크게 아쉬울 것도 없다. 김 위원장이 입으로는 “기간 연장”을 말하고 야당 추천 위원들의 압박으로 전체위원회에서도 이를 의결했지만, 위원회 안팎의 관계자들은 대부분 김 위원장이 기간 연장에 적극적으로 나서리라는 데 회의적이다.
기간 연장을 하려면 올해 11월 말까지는 여야가 부처 간 예산 조정을 통해 내년 추가 예산을 확보해야 한다. 여당으로서는 진실화해위 기간 연장이 일종의 꽃놀이패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의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겠다며 만든 기구에 미련이 있을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야당이 강력하게 기간 연장에 따른 추가예산 확보를 원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다른 카드와 맞바꾸면 된다. 야당 입장에서는 극우 인사가 주도권을 쥔 기구에 흥미가 크게 없다. 추가 예산확보 리스트의 우선순위에 배치할 동력이 약하다.
김 위원장이 신호를 보내는 대상은 누구일까. 대통령 윤석열인가, 아니면 다른 고위 실력자인가. 김 위원장이 공정한 직무 수행을 방기한 진실화해위는 이대로 가다간 곧 정해진 기한을 맞아 해체 수순을 밟을 것이다. 결국 가장 피해를 보는 이는 애타게 조사 개시와 진실규명을 기다리는 신청자들이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