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한 가정집에서 나순월씨가 안옥자씨를 도와 씻기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누구나 혼자 씻기 어려워지는 때가 온다. 다리와 허리 건강이 나빠지면서 노인장기요양 3등급을 받은 김정자(85·서울 양천구)씨는 지난달부터 일주일에 한번 샤워할 때 요양보호사의 도움을 받는다. 요양보호사는 머리를 감겨주고, 등에 비누칠을 해준다.
김씨는 매일 때를 밀 정도로 씻는 걸 좋아했지만, 혼자 움직이기 어려워진 뒤로 요양보호사가 주 1회 등을 밀어주는 것에 만족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김씨 딸 박옥숙(55)씨는 “엄마한테 ‘이제는 혼자 목욕 못 하니까 일주일에 한두번만 하고, 겨울에는 한번만 하자’고 얘기를 하자 답답해하고 속상해하셨다”고 말했다.
■ 일주일에 한시간…그나마 목욕 시간은 15분
혼자 씻지 못한다는 것은, 타인의 시간에 맞춰 ‘씻을 권리’를 유보해야 한다는 뜻이다. 홀로 씻을 수 없는 상황을 상상해보지 못했던 이들은 처음엔 이 사실 앞에 비참함을 느낀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씻고 싶은 마음’을 양적·질적으로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매일 때를 밀고 싶어도 일주일에 한번만. 한시간 씻고 싶어도 15분만. 기대 수준을 낮춰야 덜 불행해진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지난 6월 말 기준으로 집계한 방문요양서비스를 받는 65살 이상 노인은 8만1539명이다. 재가 장기요양서비스 이용자들은 하루 최소 3시간씩 식사·청소 등 일상생활을 돕는 방문요양 서비스와 일주일에 한번(한시간) 진행되는 방문목욕 서비스를 각자에게 허용된 월 한도액 112만1100원(5등급)~188만5000원(1등급) 내에서 필요에 맞게 선택한다. 등급과 관계없이 방문목욕 서비스는 일주일에 한번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요양보호사가 2인1조로 투입돼 일주일에 한번 씻을 수 있는 ‘소중한’ 한시간마저 정작 준비·정리 시간을 빼면 순수 목욕 시간은 15분 안팎에 불과하다.
더 자주 씻고 싶다면 돈을 더 써야 한다. 방문요양 서비스의 급여는 시간당 2만3480원인데, 방문목욕은 집에서 씻더라도 4만6250원으로 두배 가까이 비싸다. 물론 방문요양 서비스에도 ‘세면 도움’, ‘몸 청결’, ‘목욕 도움’ 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별도로 방문목욕 서비스가 있는데다 지침이 모호하다는 이유나 안전 문제 등으로 요양보호사들이 목욕 지원을 꺼리는 경우가 흔하다.
■ 등급 낮으면 목욕 서비스도 ‘사치’
안옥자(84)씨는 하루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생활한다. 지지대를 붙잡아야 겨우 일어날 수 있다. 올해 봄 시장에서 장을 보다 넘어져 1·9번 척추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안씨는 노인장기요양 5등급 판정을 받았다. 덕분에 방문요양 서비스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제한된 월 한도액(112만1100원) 때문에 방문목욕 서비스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요양보호사에게 비누칠이 아닌 때 밀기를 해달라고 했지만, 완곡히 거절당했다. 꾸미기는커녕 세수조차 어려워졌다.
지난 9일 서울 종로구 무악동의 아파트에서 만난 안씨는 “하이힐 신고 화장하는 걸 좋아했는데, 매일 하던 세수도 어려우니까 귀찮아. 못 움직이는 몸을 보면 답답하고 슬프고, 인생무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안씨 손가락에는 칠한 지 오래된 것 같은 빨간 매니큐어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안옥자씨 집 찬장에 있는 각종 향수들. 그는 뾰족 구두와 향수를 뿌리며 멋내는 게 낙이었지만, 지난 봄 낙상한 뒤 척추 수술을 받고 대부분 집에서 누워 지낸다. 윤연정 기자
그가 방문요양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며 일주일에 한번 목욕을 할 수 있게 된 건 순전히 운이 좋아서다. 같은 층에 사는 나순월(72)씨가 종로시니어클럽에서 한달에 20여만원 실비만 받고 노인 돌봄 봉사를 하고 있어서다. 나씨는 지난 6월부터 매주 한번씩 안씨의 때를 밀어주고, 안씨는 방문목욕 시간을 방문요양 서비스로 전용할 수 있게 됐다.
이날도 목욕에 앞서 욕실에 미리 온수를 틀어놓는 일부터 시작해 안씨가 넘어지지 않도록 의자에 잘 앉히고, 구석구석을 씻겨주고 로션을 발라주는 일까지, 30분 가까운 목욕 시간을 나씨가 도맡았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워 미소를 머금은 안씨가 말했다. “상쾌해, 기분 좋아.”
노인들의 ‘씻을 권리’ 최전선에 있는 요양보호사들도 종종 난감한 상황에 맞닥뜨린다. 7년째 요양보호사로 근무 중인 김아무개(53)씨는 “가족이 같이 살고 있는데도 어르신이 사용하는 안방 화장실 막힌 변기를 다음날 요양보호사가 방문할 때까지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며 “창틀 먼지를 닦아달라고 하기도 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현재 가이드라인은 요양보호사에게 요구할 수 있는 업무와 관련해 모호한 대목이 많다. 이 때문에 서비스 이용자도 제공자도 불편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김씨는 “창틀 청소, 큰 유리창 청소 등은 가사도우미를 불러서 해야 한다. 서비스 이용 시간인 3시간 안에 모든 요구를 수행하기 어렵다”며 “가이드라인을 구체화해 꼭 필요한 서비스 세가지 정도에 집중해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연정 기자 yj2gaz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