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돌을 맞아 25일 오전 중국 뤼순 국제항일열사기념관을 찾은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단재신채호선생 기념사업회 등 항일독립운동가단체 협의회 회원들이 안 의사의 흉상에 꽃을 바치고 있다. 뤼순/연합뉴스
안중근 의거 100돌
순국한 뤼순감옥 독방 동양평화 열정 오롯이
순국한 뤼순감옥 독방 동양평화 열정 오롯이
100년 전에도 10월 말 하얼빈의 바람은 이렇게 매서웠을까?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을 뒤흔든 7발의 총성, 쓰러진 이토 히로부미, 그리고 붙잡힌 서른살 조선 청년의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의 러시아어) 외침, 거기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독립전쟁을 수행중인 대한국인 안중근이 서 있었다.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이토를 저격했다”고 밝혔고, 결국 그로 인해 목숨을 내놓아야 했던 안중근이 일깨우려 했던 ‘아시아의 평화롭고 동등한 공존’의 정신은 하얼빈 의거 100돌을 맞은 오늘날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안 의사가 의거에 성공한 뒤 붙잡혀 144일 동안 갇혀 있다 순국한 뤼순감옥. 지난 21일 찾은 이곳에선 아직도 안 의사의 명징한 삶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오롯이 간직돼 있었다. 4m 높이의 붉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감옥 한쪽 쇠창살로 포위된 붉은 벽돌 건물 독방에는 안 의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동양평화론> 집필에 매달렸던 현장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과 중국의 희생을 강요하는 이토의 ‘극동평화론’에 맞서, 한·중·일이 동등하게 평화와 발전을 이뤄가길 꿈꿨던 그의 ‘동양평화론’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미래의 설계도’이다.
중국 땅에 있는 안 의사의 흔적은 최근 중국 정부가 강조하는 ‘중화민족의 단결’에 묻혀 희미해지고 있다. 100년 전 의거 현장인 하얼빈역 플랫폼에는 안 의사가 총을 쏜 곳을 표시하는 세모와, 이토가 서 있던 지점을 알리는 네모가 수수께끼 같은 타일로 표시돼 있을 뿐 당시 의거를 알리는 어떤 글귀나 표지판도 없다. 2006년부터 우리 쪽은 의거를 알릴 표지판을 세우려고 요청해 왔지만, 중국은 아직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다. 안 의사가 동지 우덕순, 유동하와 거사 계획을 검토했던 하얼빈공원(자오린공원) 한편에도 안중근의 시 구절에서 따온 청초당(靑草塘)과 연지(硯池)라는 글귀가 새겨진 조그만 돌비석이 서 있을 뿐 의거의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지난 21일 하얼빈사회과학원 주최로 열린 안중근 관련 토론회는 한국 언론의 취재가 봉쇄됐고, 25일 열릴 예정이던 뤼순감옥 안 항일열사기념관 개관식도 중국 당국의 불허로 열리지 못했다. 안중근을 둘러싼 현재의 미묘한 긴장은 그가 100년 전 내놓은 한·중·일 평화적 공존의 호소가 여전히 절실함을 보여주는 역설적 상징이다.
신운용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책임연구원은 “안 의사는 근대 이후 일본인들에게 처음으로 새로운 가르침을 준 한국인이었으며, 그의 거사가 오늘날에도 한국과 중국, 일본 모두에 화해와 공존의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서명훈 하얼빈조선민족사업촉진회 명예회장도 “‘한국만의 안중근’이 아닌 ‘세계의 영웅, 아시아의 영웅’으로 남북한, 중국, 일본, 러시아의 학자들까지 참여해 안중근 사상을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얼빈 뤼순/박민희 특파원 mingg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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