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 국정원 협력자 김아무개씨가 지난 5일 자살을 시도했던 서울의 한 모텔. 뉴스1
다음주의 질문
2001년 9월11일 벌어진 일은 도무지 사실 같지 않았다. 일상의 저녁 뒤 느긋하게 지켜보던 텔레비전에서는 거짓말같이 대형 여객기가 110층짜리 뉴욕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을 들이받고 있었다. 컴퓨터 그래픽처럼 빌딩이 무너져내리고, 사람들이 하나둘씩 떨어졌다. 어처구니없었다. 영화의 한 장면일 것이라며 애써 착각하고 싶기까지 했다.
지금 우리도 영화나 드라마 같은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 국가정보원 직원이 ‘협력자’를 통해 위조 문서를 구하고, 그 협력자는 검찰에서 사실을 털어놓은 뒤 모텔에서 피를 흘린 채 발견된다. 유서에는 국정원이 가짜 서류를 만들도록 지시했음을 내비치는 대목이 곳곳에 있다. 혈서도 발견되지만 곧 지워진다.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 같지만, 현실은 영화보다 지질하고 구차하다. 기관원은 영웅적인 액션은커녕, ‘휴민트’(인적 정보원)의 하나였을 궁박한 처지의 탈북자를 내세워 가짜 서류를 구하더니 그 비용까지 떼먹는다. 조작이 확인된 지금은 ‘위조’를 몰랐다고 뻗대는 모양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위조 문서가 버젓이 증거로 제출된 일이다. 협력자는 검찰에서 ‘위조 사실은 국정원도 알고 있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국정원은 이를 증거라며 검찰에 넘겼고, 공소유지를 맡았던 공안검사들은 1심 때의 기소 내용과 배치되는데도 이를 항소심 법원에 냈다. 결국, 국가기관이 국가의 형사사법 체계를 속이려 든 것이 된다.
이게 자본주의의 심장부를 노렸다는 9·11과 뭐가 다를까. 선거제도와 사법제도는 우리 민주주의의 주요한 축이다. 국가권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공정한 선거, 그리고 법과 절차에 따라 형벌을 가하고 분쟁을 해결하는 투명한 사법시스템이 붕괴한다면 더는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국정원은 이들 두 축을 공격했다. 지난 대통령선거 때 인터넷 댓글을 통한 조직적인 여론조작으로 선거제도의 공정성을 위협한 데 이어, 이번 ‘서울시 공무원 간첩 사건’에선 조작된 증언과 위조 서류로 사법체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제 누가 국가기관이 내놓은 증거가 조작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것만으로도 국정원은 국가체제와 공공의 안녕을 지키기는커녕 되레 위협하는 조직이 된다.
따지자면 국정원 자체가 태생부터 비정상의 산물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나 영국의 비밀정보국(SIS, 별칭 MI6) 등이 전쟁 시기에 대외 군사정보의 수집과 공작을 위해 창설된 것과 달리,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는 명분이야 어떻든 실제로는 5·16 쿠데타 세력의 입지 강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1963년 공화당 창당부터 중정이 주도했다. 1979년 현직 중정 부장과 직원들이 대통령 살해에 집단으로 가담한 뒤에도, 중정은 신군부 아래서 관제 야당들을 만드는 실무를 맡았다. 첩보 수집보다 정치공작과 정치개입 구실이 두드러진 게 한국 정보기관의 역사였다. 보안관리를 앞세워 공공연하게 군림하고 이것저것 대놓고 간섭하는 지금까지의 행태도, 좀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다른 나라 정보기관과 다르다. 때로는 비공식도 감행해야 할 첩보기관이 법과 절차가 중시되는 범죄수사를 맡는 것도 희귀한 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처럼 조작 증거까지 들이밀게 됐을 것이다. 이제는 헌법과 법률에 의한 통제나 정치적 제어조차 여의치 않은 괴물로 자랐다. 그런 비정상에 우리가 너무 오래 익숙해 있던 탓에 지금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검찰은 증거 조작에 대한 조사를 본격 수사체제로 전환하기로 했다. 조작이 확인됐으니 법적 책임을 따지자는 것이다. 하지만 몇 사람을 기소하는 정도에 멈췄다간 비슷한 일이 또 반복될 수 있다. 기둥과 건물이 무너지는 판에 창문만 갈아끼우는 꼴이 된다. 당장 이런 희유의 정보기관이 왜 수십년간 그 모습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국정원 협력자부터 유서에서 국정원은 개혁보다 아예 바꾸라고 대통령에게 부탁하지 않았던가.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yeopo@hani.co.kr
여현호 사회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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