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 6월5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 간담회에 참석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대법관 몇 사람이 야간 통행금지에 걸렸다. 부산 동래온천에서 한잔하다 그만 늦어버린 것이다. 경찰의 불심검문에 신분증을 내보여야 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우리는 대법원에 있는 사람들이요.” 그러자 경찰관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대법원이 어디에 있는 절입니까. 우리는 부산에 그런 절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인 김병로 평전>(김학준 지음)에 나오는 코미디 같은 이야기다. 1950년 부산 피난 시절, 대법원이 생긴 지 2년밖에 안 된 때이니 그럴만했다.
이제 대법원을 사찰로 오인하는 사람은 없다. 법원은 그동안 크고 세졌다. 권위주의 시대에는 정치권력에 짓눌렸지만, 민주화 이후에는 지위가 달라졌다. 검찰의 구형을 베끼던 ‘정찰제 판결’의 치욕이 사라진 자리에 법관의 자유재량이 자리 잡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국민의 권리 보호를 위한 사법권이 국민과 동떨어진 치외법권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학계를 중심으로 ‘제왕적 사법부’에 대한 우려가 나온 지 오래지만, 바로잡으려는 시도는 없었다. 견제하고 비판해야 할 정치권과 언론도 법원과 잘 지내려고만 했다.
사법농단은 그런 토양에서 싹텄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권력욕은 사태의 일면이다. 사법부가 ‘제왕적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사법권을 집단 사유화한 상황에서는 언제고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이 사건 이후 법원과 법관에 대한 신뢰는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언제, 누구라도 사건 당사자가 됐을 때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깨졌다.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는 사법개혁 요구는 결국 ‘어떻게 하면 사법부를 다시 국민의 민주적 통제 아래 둘 수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을 찾는 일이다. 신뢰 회복도 거기서 출발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의문이 든다. 이렇게 중요한 사법개혁을 사법농단 의혹의 중심에 있던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주도해도 좋은가.
대법원은 김명수 원장의 지시에 따라 사법개혁안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7일에는 대법원장 자문 기구인 사법발전위원회(사발위) 산하 ‘사법발전위원회 건의 실현을 위한 후속추진단’(추진단)이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만들어 발표했다. 비판이 집중된 사법행정 체계를 손질하는 내용이다. 곧 국회에 입법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대법원이 ‘사법발전위원회’와 함께 국민의 뜻을 담아 사법제도 개혁을 이뤄낼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9월13일)에 고무된 것일까. “논문 표절 의혹을 받는 교수들한테 표절 근절 방안을 만들라고 하면 그게 온당한 일일까요?” 어느 로스쿨 교수의 한 마디가 정곡을 짚었다.
대법원이 마련 중인 사법개혁안은 내용을 따지기 전에 ‘대표성’이 문제다. 사발위부터 그렇다. 현직 법관 3명, 전직 법관 출신 법무부 간부 1명, 변호사 2명, 로스쿨 교수 2명, 언론인 2명, 시민단체 대표 1명으로 짜인 이 위원회에 국민 대표성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저 김명수 대법원장이 임의로 선정해 구성한 위원회일 뿐이다. 당연히 일반 국민의 뜻을 수렴할 ‘통로’도 보이지 않는다. 추진단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국회와 달리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대법원장이 다시 대표성을 갖지 못한 사발위와 추진단을 꾸려 사법개혁을 주도하는 모양새다.
절차도 일방통행이다. 그 흔한 공청회 한 번 없이, 법 전문가들끼리 모여 몇 차례 토론한 뒤 법원조직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지금 같아선 이 개정안 그대로 국회에서 통과시켜 달라고 할 기세다.
개혁 대상인 법원의 ‘셀프’ 개혁안을 국회가 ‘추인’만 해서는 곤란하다. 헌법이 애초 사법부에 법안발의권을 주지 않은 이유를 새길 필요가 있다. 국회가 추진 중인 특별재판부 설치도 위헌이라고 정면 반박하는 대법원이다. “법원조직은 법률로 정한다”고 헌법(제102조 3항)에 규정돼 있다. 국회의 권한이라는 뜻이다. 문 대통령이 말한 ‘국민의 뜻’을 듣는 절차도 국회 사법개혁특위가 새로 밟아야 한다. 사법부의 의견은 국회가 필요한 만큼 청취하고 반영하면 된다.
사법부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멀리에 있지 않다. 사법개혁을 국회가 주도하는 것, 그 자체가 민주적 통제의 과정이다. 법원을 위해서도 그게 바람직하다.
강희철 법조팀 선임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