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 폐지안을 놓고 법원 내 의견수렴에 들어간 김명수 대법원장의 행보를 놓고 법조계에서는 “지나치게 좌고우면한다”, “신중한 행보를 탓할 수만은 없다”는 엇갈리는 평가가 나온다. 지난 10월10일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에 출석한 김 대법원장.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다시, 법원행정처 개혁이 이슈로 떠올랐다.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의 중심이었던 법원행정처(행정처) 개혁안을 두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12일 사법부 내부 의견수렴에 나서겠다고 하면서다. 13일에는 전국 법원 대표판사들의 회의체인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오는 19일 제2차 정기회의에서 행정처 업무 이관 문제를 논의한다고 밝혔다. 올 연말까지가 활동 시한인 국회 사법개혁특별위원회의 안건으로도 잡혀 있다.
논의 대상은 대법원장 자문기구인 ‘국민과 함께하는 사법발전위원회’(사발위)와 ‘사발위 건의 실현을 위한 후속추진단’(추진단)이 지난 7일 발표한 행정처 개혁안(법원조직법 개정안)이다. 주요 내용은 사법행정을 총괄해온 행정처 폐지와 이를 대신할 ‘사법행정회의’ 신설, 사법행정 집행을 맡을 법원사무처와 대법원 운영을 담당할 대법원 사무국 설치 등으로 요약된다.
핵심 쟁점은 역시 행정처 폐지와 사법행정회의 신설이다. “사발위는 행정처 개편 방안을 이루는 여러 쟁점 중에서 ‘(가칭)사법행정회의’의 위상과 역할에 관하여는 단일안을 채택하지 못하였고, 추진단 역시 (…) 이에 관하여 완전히 의견을 모으지는 못했다”고 김 대법원장도 12일 ‘말씀 자료’에서 밝혔다. 가장 큰 이해 당사자인 법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린다고 한다.
이견의 이유는 법원 창립 이래 가장 큰 변화이기 때문이다. 사법부의 정점에 있는 대법원장과 대법원은 행정처를 통해 전국 법원과 법관들을 통제해 왔다. 행정처는 법원 내 ‘주류’ 엘리트의 산실이기도 했다. 그러니 행정처의 존폐 논의는 그 자체로 충격일 수 있다. 당연히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다.
“행정처 폐지는 단순히 있던 기구가 없어지고, 다른 기구로 대체된다는 차원이 아니다. ‘사법 기득권층’의 재생산 토대가 허물어지는 것이다. 우리나라 판사는 두 부류가 있다. 행정처를 거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못 가본 사람들은 소외되고, 거친 사람들은 대부분 법원 내 ‘주류’가 되어 고법부장, 법원장, 나아가서는 대법관, 대법원장을 바라본다. 행정처는 이런 ‘사법 엘리트’들의 양성소였다. ‘윗분’들 눈에 띄어 행정처 들어가고, 일정 기간 근무한 뒤 일선 법원에 나가 재판하다가 다시 행정처 고위직으로 들어가고 하면서 잘 나가는 사법 관료 집단이 만들어졌다. 그런 ‘그들만의 리그’가 대한민국 법원을 지배했다. 그런데 (추진단 안처럼) 행정처가 없어지고, 사법행정에서 법관들이 배제된다는 건 이들의 기대와 희망이 한꺼번에 사라진다는 뜻이다. 저항이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판사 출신 변호사)
지난해 <경향신문>이 이용훈·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12년간 법원행정처 출신 판사 456명을 전수 조사한 결과를 보면, 100%(456명 전원)가 고법부장으로 승진했다. 법원장이나 대법관으로 가는 ‘티켓’은 대부분 그들 몫이었다는 뜻이다. 행정처를 거치지 않은 일선 판사들의 고법부장 승진율은 15% 안팎이니 하늘과 땅 차이다. 또 법원행정처 차장의 80%는 대법관이나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됐다. 왜 판사들이 그토록 행정처 근무를 간절히 바라고 선호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행정처는 대법원장의 ‘직할부대’이기도 했다.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제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비결은 법관 인사권과 직속 기구인 행정처다. 법관 인사와 예산, 정책을 총괄하는 행정처는 대법원장과 수직으로 연결돼 비서조직처럼 움직였다. 특히 행정처 살림을 책임진 차장은 ‘대법관 0순위 후보’로 여겨지면서 원장의 지시를 충실히 수행하는 ‘실세 비서실장’(대법원장 비서실장은 따로 있다) 역할을 맡았다.
“누구든 그 자리에 가면 대법관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 생각하면서도 대법원장의 최종 ‘낙점’을 받기 위해 더 죽으라 일했다. 양승태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의 관계가 전형적인 사례다.”(임종헌을 잘 아는 변호사)
그렇다면 주요 국가에서 법원행정처는 어떤 위상으로,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을 제외한 대부분 선진국에는 우리나라 행정처와 같이 대법원장 직속으로, 그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사법행정기구는 어디에도 없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리에 충실하기 위해서다.
미국에서 법원행정처(Administrative Office Of the United States Court, AO 또는 AOUSC)는 연방사법회의(Judicial Conference of the United States)에 소속돼 있다. 연방사법회의는 미국 연방 사법행정의 최고의결기관으로, 각급 연방법원을 대표하는 13개 연방항소법원장과 12개 항소구 대표판사, 국제통상법원장 포함 26명으로 구성된다. 각 항소구별 대표판사는 법관들이 투표로 뽑고, 임기는 3~5년이다.
연방대법원장은 연방사법회의의 의장을 맡지만, 법원행정처에 대한 지휘·감독 권한이 없다. 미국 법원행정처는 연방사법회의의의 지휘·감독을 받는다. 연방대법원장은 우리와 달리 법관 인사권도 없다.
미국에서 법원행정처는 연방사법회의의 사무국인 셈이다. 연방사법회의가 연방법원의 사법행정 정책, 각급 법원의 재판 절차의 통일 및 효율 제고를 위한 방안, 법관 증원 등 사법행정에 관한 입법 사항 등을 결정하면 법원행정처가 집행을 맡는 구조다. 정책 결정과 집행이 분리된 것이다. 법원행정처장은 연방사법회의 사무처장이기도 하다. 연방 사법조직과 하급 법원의 예산 확보도 법원행정처의 주요 업무 중 하나다.
“미국 법원행정처에는 상근하는 판사가 없다. (…) 대부분 행정처 간부들이 변호사 출신으로 오랜 기간 담당 업무에만 종사해 온 사법행정의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재판 업무에 종사하던 판사와 직원들이 순환보직으로 행정처에 근무하는 우리나라보다 행정의 전문성은 더 높은 편이다.(강한승, <미국 법원을 말하다>) 행정처는 연방대법원 청사와는 무관한, 별도 건물에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 추진단 안은 미국식 모델과 관련이 깊어 보인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추진단이 짧은 기간에 안을 만들면서 미국식 모델을 많이 참조한 것 같다”고 평했다.
영국에서 법원행정처는 ‘법원행정청’(Her Majesty’s Courts Service)으로 불리는데, 법원이 아니라 법무부 소속이다. 사법부와 사법행정은 엄격히 분리돼 있다. 법원행정청은 법무부 장관이 사법행정 관련 정책의 큰 그림을 그려 내면 이를 집행하는 역할이다. 즉 영국 모든 법원에 대한 사법행정권을 장관에게서 위임받아 행사하는 것이다.
독일은 연방법원과 주 법원의 재판권이 분할돼 있고, 연방 차원에서는 헌법재판소와 통상·노동·행정·사회·재정 등 전문 법원이 설치돼 있어 ‘단일’ 대법원인 우리와는 체계가 다르다. 사법행정권도 분산돼 있다. 사법행정의 최종 감독권은 법무부 장관이 갖는다. 법관 인사는 연방과 주 차원의 법관인사위원회가 맡고, 직무 감독과 징계권은 연방최고법원장의 몫이다. 또 모든 법원에는 법원운영위원회가 구성돼 재판부 구성과 사무분담 등을 결정한다.
프랑스도 사법행정은 법무부 장관이 담당한다. 헌법상 사법부가 따로 없기 때문에 법원조직은 법무부에 속해 있고, 따라서 사법 정책은 물론 법관의 직무 감독·인사·급여 등 사법행정 사무는 모두 법무부 장관의 직무다. 법무부 사법행정국 산하에 기획조정실과 사법관실, 법원공무원실을 두고 있다. 법관(검사 포함)의 인사·징계·윤리 관련 사항 등은 법무부 장관보다 상위인 ‘최고사법위원회’(의장 대통령)에서 처리한다. 법무부 장관은 재판 업무에 관여할 수 없고, 법관의 신분상 독립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엄격히 보장된다.
우리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곳으론
일본이 유일하다. 발생사로 보면, 우리가 일본 제도를 베꼈다고 보는 게 맞다. 우리나라 행정처 격인 일본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이 법관 인사와 조직, 예산 등 사법행정 사무를 담당한다. 또 사무차장과 국·과장을 법관이 맡는다. 법제엔 각급 재판소의 ‘재판관 회의’가 사법행정권을 갖는다고 돼 있으나, 인사권을 가진 최고재판소가 사무총국을 통해 사법행정권을 행사하는 구조다.
법관은 심급별로 임명 절차가 다르다. 우리 대법원장 격인 최고재판소장은 내각이 지명하면 국왕이 임명하며, 대법관인 최고재판관은 내각이 임명권을 갖고 국왕은 인증만 한다. 나머지 판사들은 최고재판소가 지명하면 내각이 임명한다. 10년 간격의 승진 개념이 있고, 법관 인사이동도 3년에 한 번씩 이뤄진다. 인사이동과 승진, 보직 부여는 최고재판소 재판관회의에서 결정한다. 우리나라도 ‘대법관이 아닌 법관은 대법관회의의 동의를 얻어 대법원장이 임명한다’(헌법 제104조 3항)고 돼 있다. 일본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법관에 대한 인사평정은 법원장이 한다.
“사무총국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방향과 다른 판결이나 논문을 쓴 사람 등 사무총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법관)에 대해서는 보복성 인사로 굴욕을 맛보게 하거나 괴롭힐 수 있다. 이는 그 판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다. 이런 인사가 무서운 것은 이런 보복이나 본보기가 언제, 무엇을 근거로 행해질지 모른다는 점이다. 어쨌든 사무총국의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판사들은 넙치처럼 늘 그쪽만 엿보며 재판을 하게 된다. 당연히 판결의 적정성이나 당사자의 권리 따위는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세기 히로시 메이지대 법과대학원 전임교수가 쓴 <절망의 재판소>(사과나무·2014) 중 일부다. 그도 최고재판소 사무총국을 거친 엘리트 판사였다. 그러나 30년 넘게 법관으로 산 그의 눈에도 사무총국이 하는 일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일본 법관사회를 ‘수용소군도’에 빗대기도 했다. 민주주의에 어울릴 리 없다.
‘사무총국’을 ‘법원행정처’로 바꾸면 그대로 우리 현실이 된다. 지난해 3월 국제인권법연구회 학술행사에서 발표된 법관 507명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대법원장과 법원장의 정책에 반대하면 인사나 평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의견이 87.5%나 됐다. 응답 법관의 절대다수인 96.6%는 법관 독립을 위해 사법행정에 개선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1949년 법원조직법을 처음 만들 때 행정처를 어디에 둘 것인가는 중요한 쟁점이었다고 한다. 먼저 법무부에 두는 방안이 검토됐지만, 사법행정을 행정부에서 분리하자는 의견이 힘을 얻으면서 결국 대법원장의 지휘를 받는 행정처가 만들어졌다. 대통령에게 예속될 것을 우려한 입법이 애초 의도와 달리 대법원장에게 엄청난 권력을 안겨준 셈이다.
이렇게 생겨난 행정처는 흔히 말하는 ‘사법관료 양성소’ 그 이상이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는 일선 법관들을 감시하는 통제소였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애초 법관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이 점차 비대해지며 물구나무를 선 것이다.
강희철 선임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