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대(왼쪽)·고영한 전 대법관. <한겨레> 자료사진
7일 법원이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하자 후폭풍이 거세다. 전직 대법관과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사전 포석’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자칫 구속기소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청와대와의 교감 아래 수년간 지속된 재판 개입과 법관 사찰의 책임을 홀로 떠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영장 기각 사유를 본 법원 내부에선 “법원행정처 구조상 행정처장을 맡은 두 전직 대법관을 빼놓고는 사법농단을 설명할 수 없다. 누구보다 잘 아는 법원이 이런 판단을 내린 것은 결국 ‘양승태 지키기’로 보인다”는 지적이 많았다. 전직 대통령을 두 명이나 구속했던 법원의 이런 태도에 “대통령 위에 대법관”이라는 말도 나왔다.
■ 공모관계 성립 의문? 임민성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10월27일 “범죄사실 중 상당 부분이 소명된다”며 임 전 차장의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그랬던 임 부장판사가 이번엔 임 전 차장의 공소장에 31차례나 ‘공모자’로 등장하는 박 전 대법관에 대해 “범죄 혐의 중 상당 부분에서 피의자의 공모관계 성립에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고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기각한 명재권 영장전담 부장판사도 “일부 범죄사실에서 공모 여부에 대한 소명 정도”를 언급했다. 재판에 넘어간 임 전 차장의 범죄사실 중에는 고 전 대법관이 18차례 ‘공모’했다고 나온다. 임 전 차장 때는 ‘소명’된 범죄혐의가 두 전직 대법관 때는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는 것이어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을 구속할 때 소명됐다고 판단한 범죄사실이 정작 그 윗사람인 전직 대법관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행정처의 수직적 관계, 특히 유력한 차기 대법원장으로 사법행정을 장악해온 박 전 대법관의 위상을 고려하면 더욱 납득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임 전 차장이 대법원장에 버금가는 박 전 대법관을 ‘패싱’하고 양 전 대법원장에게 직접 보고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다른 판사도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임 전 차장에게 지시하는 경우는 일부 있었겠지만, 보고 단계에서 임 전 차장이 ‘박병대’라는 존재를 무시한다는 것은 행정처 내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그럼 몇 년간 임종헌 혼자 그런 일들을 몰래 하고 있었다는 얘기냐”고 반문했다.
이는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유죄를 선고한 박근혜 정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과도 비교된다. ‘박근혜 대통령→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청와대 비서관→문화체육관광부 장관’으로 이어지는 공모관계가 인정돼 유죄가 선고됐다. 한 변호사는 “상급자는 지시를 부인하고 하급자는 윗선에 불리한 진술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 공모관계를 입증할 증거가 부족했을 수 있다”면서도 “중간 관리자가 입을 다물어 상급자가 처벌받지 않게 된다면, 이런 유형의 조직범죄에서 처벌의 형평성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증거가 확보됐으니 기각? 임민성 부장판사는 “이미 다수의 관련 증거자료가 수집되어 있다.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박 전 대법관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명재권 부장판사도 “피의자(고영한)의 주거지 압수수색을 포함해 광범위한 증거수집이 이루어졌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법원 일부에선 “공모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해놓고선 ‘증거는 수집됐다’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굳이 이런 표현을 넣은 이유가 앞으로 검찰이 보강수사를 통해 추가 증거를 담은 구속영장을 재청구하더라도, ‘이미 광범위한 자료가 수집됐지만 소명은 부족하다’며 다시 영장을 기각하기 위한 ‘비상구’로 보는 시각도 있다.
‘광범위한 증거수집’을 강조하면서도 범죄혐의에 대한 ‘소명’에는 의문을 제기한 것을 두고 영장심사가 아닌 사실상 재판 단계의 유무죄 판단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공모관계 등은 유무죄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양형을 판단하는 단계에서 감안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주거지 압수수색을 강조한 것도 이례적이다. 형사사건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할 정도의 사안이면 보통 ‘주거지 압수수색’은 기본적으로 이뤄진다. 일반 형사범에게는 당연한 절차가 ‘전직 대법관’에게는 구속영장을 기각할 만한 특별한 명분이 된 것이다. 영장 기각 사유에 ‘도주 우려가 없다’고 명시하진 않았으나, 임민성 부장판사는 “피의자의 주거 및 직업, 가족관계 등을 종합”해 영장을 기각했다고 밝혔다. 특히 “가족관계”까지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전날 박 전 대법관과 변호인은 “93살 노모”를 언급하며 “집에 돌아갈 수 있는지 판사님께 달렸다. 구속을 면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김민경 고한솔 최우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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