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6월1일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자신의 집 근처 공원에서 판사 뒷조사와 재판 거래 의혹 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검찰에서 수사를 한답니까?”
지난해 6월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집 근처 놀이터에서 자청한 기자회견에서, 검찰 수사에 응할 것인지를 묻는 취재진에게 이렇게 되물었다. 자신을 감히 수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특권 의식’이 깔려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그로부터 225일째인 11일 오전 9시30분, 양 전 대법원장은 전직 대법원장으로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15층 조사실에 앉는다. 피의자 신분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놀이터 기자회견에서 단언했던 것과 달리, 이후 검찰 수사를 통해 그가 재판 개입과 판사 블랙리스트 실행에 깊숙이 관여한 사실이 드러났다.
■ “놀이터 기자회견은 위선적”
“대법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부당하게 재판에 간섭하고 관여한 바가 결코 없다. 재판은 정말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놀이터 기자회견에서 재판 개입·거래 의혹을 단호하게 부인했다.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판이 특히 그렇다. 양 전 대법원장은 ‘수족’처럼 부리던 법원행정처를 통해 청와대와 외교부가 요구한 재판 지연 및 판결 번복 방법을 궁리했다. 전범기업을 대리하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를 대법원장이 직접 만나는 ‘있을 수 없는’ 특혜도 제공했다. 한 판사는 10일 “놀이터 기자회견 당시는 일제 강제동원 재판을 둘러싼 의혹이 본격화하기 전이었다. 양 전 대법원장이 더는 부인하기 어려워 보인다”고 했다.
“정책에 반대하거나 특정 성향 사람에게 불이익을 준 적이 전혀 없다.”
양 전 대법원장은 놀이터 기자회견에서 판사들을 사찰하고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을 일축했다. 그러나 검찰이 법원행정처에서 확보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문건’에는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자필 서명’을 통해 특정 판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주도록 한 정황이 뚜렷하다. 또 다른 판사는 “놀이터 기자회견은 그 자체로 위선”이라고 꼬집었다.
양 전 대법원장을 대리하는 최정숙 변호사는 이날 “양 전 대법원장이 검찰 조사에서 진술을 거부하지 않겠다고 했다. 기억 나는 대로 말씀하실 것”이라고 밝혔다.
■ 대법원에서 입장 발표 강행…충돌 가능성
양 전 대법원장 쪽은 11일 오전 9시 대법원 정문 앞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입장을 발표한 뒤 승용차를 타고 서울중앙지검으로 이동해 조사받겠다는 태도를 굽히지 않고 있다.
법원노조는 이를 몸으로 막겠다고 예고했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관계자는 “11일 아침 법원노조 간부 30~40명이 대법원 문 앞에 나와 양 전 대법원장을 막아설 것”이라고 밝혔다. 법원노조는 성명을 통해 “대법원 기자회견은 법원 내 적폐세력을 결집하겠다는 의도”라고 주장했다. 한 판사는 “대법원을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이런 발상을 할 수 없다”고 짚었다.
입장 발표 도중이나 이후 수백 미터 떨어진 검찰청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양 전 대법원장을 규탄하거나 지지하는 쪽과의 물리적 충돌 가능성도 있다. 관할 서울 서초경찰서에는 사법농단 피해자 쪽 집회와 보수단체 집회가 모두 신고돼 있다. ‘대법원→검찰청’ 이동 과정에 일부 도로가 봉쇄될 것으로 보인다.
양 전 대법원장이 중앙지검 청사로 들어오면, 사법농단 수사팀을 이끄는 한동훈 3차장검사가 예우 차원에서 양 전 대법원장과 차 한잔을 할 예정이다. 이어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조사받았던 15층 조사실로 이동하게 된다. 단성한·박주성·조상원 등 특수부 부부장검사가 돌아가며 조사를 진행한다. 검찰은 심야 조사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조사 내용이 많아 최소 두차례 이상 소환할 방침이다.
고한솔 최우리 임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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