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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판사 앞길 좌우한 대법원장의 시그널 ‘ V ’

등록 2020-01-04 10:50수정 2020-01-04 11:06

[토요판] 법정에 선 양승태 사법부
16. 무기가 된 ‘깜깜이’ 인사

대법원장에 쏠린 법관 인사권
양승태 행정처 정책 반하면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
비판글 올린 판사 오지 전보

인사 문건에 V로 결정 표시
미확인 정보도 인사 활용
‘진보’ 판사, 형사재판 배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일부 판사들이 법원행정처 정책에 반하는 의견을 냈다가 인사상 불이익 조처를 받은 정황들이 사법농단 재판에서 공개됐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5월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 참석하려고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일부 판사들이 법원행정처 정책에 반하는 의견을 냈다가 인사상 불이익 조처를 받은 정황들이 사법농단 재판에서 공개됐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지난해 5월29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첫 재판에 참석하려고 법정으로 이동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인사 관리는 조직이 가장 효율적으로 역량을 발휘하고 본인도 만족할 수 있는 인사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인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중략) 외부로 드러난 인사 조처나 패턴도 전체에 있어서 총량에 불만이 없는 게 가장 중요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13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재판에 김연학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전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가 증인으로 나왔다. 양 전 대법원장은 법원행정처 방침을 비판하거나 튀는 발언을 한 판사에게 인사 불이익을 줬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김 부장판사는 2016~2017년 법원 인사 업무를 총괄했다. 그는 인사 불이익 의혹을 전면 부인하며 수학에서 쓰일 법한 ‘총량’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판사 개인이 아닌, 전국 판사 인사라는 큰 그림 아래에서 인사 결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사 불이익 의혹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판사 개인의 불만으로 축소됐다.

김 부장판사의 말대로 당시 인사 이동은 ‘실무상’ ‘어쩔 수 없는’ 결과에 불과한 것일까. 그동안 법관 사회에서는 ‘대법원장 눈 밖에 나면 외진 지역으로 전보된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돌았다. 사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소문은 의혹으로 번졌다. 노재호 판사(전 법원행정처 인사제1·2심의관)와 김연학 부장판사 증인신문을 시작으로 그 의혹의 실체가 재판에서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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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적 인사’ 불안감의 전염

판사들은 2~4년마다 주기적으로 전국 법원을 옮겨 다닌다. 매해 1천명 가까운 법관의 인사 이동이 이뤄지는데, 서울권-수도권-지역권을 순환하는 방식이다. 법관 인사에 반영되는 핵심 요소인 판사의 근무 성적과 자질 평정은, 원칙적으로 각 법원장이 소속 법원 판사들의 평정 자료를 작성해 대법원장에게 제출하는 방법으로 이뤄진다(근무경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음). 이렇게 작성된 판사 평정과 개인의 희망 근무지, 마일리지처럼 쌓이는 비선호 법원 근무 경력을 고려해 인사 이동이 결정된다.

문제는 인사권을 대법원장 한 사람이 쥐고 있고 그 구체적인 과정이나 기준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점이다. 해외 연수나 사법연수원 교수와 같은 선발성 인사도 마찬가지다.

이른바 ‘물의 야기 법관’은 대법원장에게 얼마나 인사권이 집중돼 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원래는 음주운전이나 금품수수, 성추행 등 이론의 여지 없이 명백한 비위 행위자들이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됐는데, 양 전 대법원장 시절에는 법원행정처 정책에 반하는 입장을 표명하거나 특정 성향을 가진 판사들까지도 ‘물의 야기 법관’으로 찍었다. 이들은 본인이 원치 않는 근무지로 배치되는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

송아무개 부장판사가 대표적이다. 2014년 권순일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이 양창수 대법관 후임으로 임명 제청되자, 2003년 사법 파동을 언급하며 “인권, 노동, 환경에 감수성을 지닌 법조인에게 문호를 개방하자”는 내용의 글을 법원 내부통신망 코트넷에 올렸다는 이유로 송 부장판사는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됐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종전 근무경력을 점수화해 송 부장판사와 같은 초임 부장판사를 A~G그룹으로 나눴다. A그룹은 원하는 법원으로 배치될 가능성이 큰 이들이라면, G그룹은 ‘물의 야기 법관’을 뜻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물의 야기 법관’ 인사 조처 검토 문건을 결재하면서 ‘송 부장판사의 인사 조처 1안(형평 순위를 강등하여 지역권에 전보한다)’ 문구 옆에 ‘결정했다’는 뜻의 ∨ 표시를 해뒀다. 그로 인해 A그룹으로 분류됐던 송 부장판사는 G그룹으로 강등됐다. 당시 법원행정처는 송 부장판사를 본인이 희망 근무지 4지망으로 써낸 울산지법으로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다시 희망지에 없던 대구지법 포항지원에 배치할까 고민하다가 창원지법 통영지원으로 인사를 냈다. 통영지원은 최대 격오지(외진 지역)로 꼽힌다. 형평 순위라는 원칙을 합의되지 않은 자의적 기준에 따라 깨버린 셈이다.

이는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인사 심의관에게도 의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노재호 판사의 지난해 11월20일 증인신문 내용이다.

“법관 정기인사 후기를 정리한 문건을 보면, 당시 초임 지법부장 배치와 관련해 ‘송아무개 부장판사의 통영 배치는 인사실이 반대했는데 인사권자 뜻이 강해 막지 못했다’, ‘주변에서 문책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기재돼 있습니다. 당시 송 부장판사의 통영 배치에 관해 증인은 그 경위를 알고 있나요.”(검사)

“인사실에서 반대한 건 알았고, 결재라인 어디에서 결정됐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노 판사)

“인사실에서 반대한 이유는 뭐라고 알았습니까?”

“송 부장판사가 ‘물의 야기 법관’으로 검토된 사안이, 판사들이 가장 선호하지 않는 지원인 통영에 배치할 정도에 해당하는 것인가, 실무자로서 다른 생각을 가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송 부장판사와 같은 기수로, 통영지원으로 함께 전보된 다른 두 명의 판사는 모두 법원행정처 출신(형평 순위가 낮아 원하지 않는 지역 발령 가능성 높음)으로, 격오지 발령이 예상 가능한 이들이었다. 인사권자의 ∨ 표시는 법관 사회에 강력한 시그널로 작용했다. 인사권자 심기를 거스르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송 부장판사의 ‘물의 야기 법관’ 분류 사건이 발생한 2014년 석연치 않은 사례는 더 있다. 동료 법관인 김동진 판사가 그해 9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1심 무죄 판결을 비판해 논란이 되자 ‘중립성을 위반한 판결 비판은 정당하다’는 제목의 글을 코트넷에 올리거나, 국회의원에게 후원금을 기부했으나 법원행정처 윤리감사관실에서 징계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된 판사도 모두 ‘물의 야기 법관’인 G그룹으로 분류됐다. 검찰은 2013~2017년 부적합한 이유로 ‘물의 야기 법관’으로 분류된 판사가 모두 31명에 이르며, 그중 9명이 선호 근무지를 배제하는 방식으로 인사 불이익 조처를 받았다고 본다.

인사권이 대법원장 1인에게 전적으로 종속돼 있고, 인사 절차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법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도 담보하기 어렵다는 법원 내부 의견이 많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인사권이 대법원장 1인에게 전적으로 종속돼 있고, 인사 절차의 투명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법관 독립과 재판의 공정성도 담보하기 어렵다는 법원 내부 의견이 많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 모습.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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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적으로 취한 ‘외관의 공정성’

‘단독판사회의 간사를 맡아 법원행정처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동료 법관과 교류해 사법행정에 부담을 줄 수 있음.’(2017년 각급 법원 법관 참고사항)

‘촛불 사건 배당 문제 관련해 법원장 메일 등을 언론에 흘린 장본인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음.’(고법부장 보임 심사 대상자 특이사항)

법원 인사에서 내부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기준이나, 확인되지 않은 출처 불명의 정보도 법관 인사에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대법원 인사 관련 문건에 적힌 위의 문구들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김연학 부장판사나 노재호 판사는 법관 인사에 구체적 기준은 없다고 증언했다. 법원장이 담당하는 평정도 마찬가지다.

특히 각 법원 사무분담(재판 업무를 나눠 판사를 배치하는 절차) 결정도 그랬다. 사회적 관심 사건을 다루는 형사재판은 특별 관리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과정에서 김 부장판사는 사무분담을 고민하는 법원장에게 비공식적 조언을 건네기도 했다. 2017년 초 수원지법원장이 전화를 걸어와 “아무개 법관은 (형사재판 맡기에) 좀 그렇지 않냐”고 묻자 “그런 점도 있는 것 같다” 정도의 의견 교환을 했다고 김 부장판사는 말했다. 당시 수원지법원장 요청을 받은 법원행정처 인사심의관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무죄 판결’, ‘국제인권법연구회 운영위원’(최아무개 부장판사), ‘진보적 성향이 외부로 표시돼 편향성 비판 야기 수회’(마아무개 부장판사)라는 이유로 특정 판사들을 음주운전 경력의 판사와 함께 형사재판에 부적합한 판사로 분류했다(수원 관내 형사재판 부적합 검토).

검찰은 형사재판 부적합 판사를 선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김 부장판사에 집요하게 따져 물었다. 김 부장판사는 ‘외관의 공정성’을 언급했다. 담당 판사가 불공정할 것이라는 의심을 사는 것 자체로 재판의 공정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김 부장판사와 검찰 사이의 법정 설전을 보자.

“증인은 진보 성향이 외부에 알려졌다는 이유로 형사재판을 하는 게 부적합하다는 인식을 가졌습니까.”(검사)

“이건 진보나 보수나 마찬가집니다. 진보가 기재돼 있는 이유는 그게 외부에 알려져서 언론이나 국회에서 이미 비난받았기 때문입니다. 공정성이나 객관성의 외관을 손상할 우려가 있고 해당 판사가 비난받을 가능성을 걱정하는 것이지, 특정 성향에 대한 판단은 아닙니다.”(김 부장판사)

“그럼 이번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으로 징계 청구된 분 중에 형사재판을 맡는 사람도 있잖습니까. 증인은 이런 분들의 경우, 형사재판을 맡는 게 부적절하다는 생각을 그 당시 혹은 지금은 갖고 있습니까.”

당시 법원행정처 기준대로라면 김 부장판사 본인도 형사재판을 맡기 어려워 보인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부 재판장을 맡은 김 부장판사는 2018년 대법원이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징계를 청구한 판사 13명에 포함됐다. 법관 징계위는 품위 손상은 인정되지만 그 정도가 약해 불문에 부치기로 했고, 김 부장판사는 여전히 형사재판을 맡고 있다. 검찰의 질문에 대한 김 부장판사의 답변은 “질문이 중복되는 것 같아서 제한하겠다”는 재판장 박남천 부장판사의 제지로 끝내 들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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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 독립의 전제조건

“전보 인사에서 경쟁관계에 있는 동료 법관보다 더 빨리, 더 좋은 보직을 받기 위해 평정권을 가진 법원장, 나아가 인사권을 가진 대법원장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법관들은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보장한다는 숭고한 법관의 사명보다는 법원장과 대법원장의 인사권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이는 결과적으로 법관의 독립을 약화하는 치명적인 원인이 될 수 있다.”(지난해 9월 전국법관대표회의 임시회의 회의자료)

현재 판사들은 의아한 인사 조처가 내려져도 이의 제기할 수 없다. 자신의 평정조차 확인하기 어렵다. 법관 독립 저해를 막기 위해 본인 의사에 반한 인사 이동 자체를 금하는 독일, 프랑스와 다르다. 대법원장의 자의적 인사권 행사는 판사 개인을 넘어 법관 사회에 공포를 전염시킨다. 인사권자의 눈치를 보게 하는 밀실 인사는 재판 독립을 침해하기도 한다. 각급 법원 대표들이 모인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법관의 인사가 최소화돼야 한다고, 그리고 불가피하게 법관 의사에 반하는 전보 인사가 이뤄지더라도 예측 가능한 기준과 절차가 마련돼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낸 이유다. 현재 법원행정처와 사법행정자문회의는 판사들의 인사 이동을 축소하고 선발성 인사 권한을 분산하는 방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제도 개선의 불씨는 댕겨졌지만, 의혹 당사자의 유무죄를 가릴 재판은 더디게 진행 중이다. 2013~2017년 법원행정처 인사 담당자 8명 중 2명의 증인신문만 겨우 진행됐다. 김연학 부장판사의 증인신문은 한차례 더 예정돼 있었으나, 양 전 대법원장이 폐암 의심 진단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그 재판마저도 미뤄진 상태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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