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여상살이 /
일곱 달 전 둘도 없이 친한 친구의 열일곱살 외동딸이 골육종 판정을 받았다. 지난 겨울방학 무렵부터 다리와 무릎이 조금씩 아프다는 걸 그 나이에 으레 겪는 성장통으로 대수롭잖게 여기다 닥친 일. 오른쪽 엉덩이 관절을 잠식한 암세포가 혈관을 통해 이미 폐까지 옮은 최악의 사례라 했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를 부르짖으며 기른, 총명하고 싹싹한 금지옥엽 여고 2년생. “하나님, 왜 하필 제 딸이에요? 실수하시는 거예요.” 무섭고 당황한 나머지 하늘을 원망했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당장 항암제 투여를 시작할밖에.
얼마가 걸릴지 모를 투병을 위해 학교는 자퇴. 3주 입원 1주 퇴원을 되풀이하며 6차에 걸친 항암 치료가 이제 거의 끝났다. 금속 엉덩이 관절을 이식하는 대수술도 무사히 치렀다. 친구는 일곱 달 내내 딸의 병상 곁 보조침대에서 새우잠을 잤다. 백혈구, 혈소판, 헤모글로빈 수치는 날마다 오르내리며 어린 환자와 부모를 괴롭혔다. 극심한 구토와 고통 때문에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아이 옆에서 함께 눈물을 쏟는 친구와 그 남편의 모습에 모두 말을 잃었다.
한 선배가 말씀하셨다. “힘들면 힘들다고 징징대야 해. 이것저것 가져다 달라고,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배워야 돼.” 남에게 도움받는 걸 부끄러워하는 건 우리들의 오랜 강박증일까? 우린 긴급구호 요청에 서투르다. 나약함을 인정하는 게 싫고, 혼자서 모든 걸 해낸다는 독립심은 우리들의 자랑이었으므로. 그렇지만 선배 말대로 때로 우린 사랑의 빚을 기꺼이 져야 한다. 나중 처지가 바뀌어 한때 도움을 받았던 이가 도움을 베풀 차례가 올 때 떳떳이 그 계좌를 사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언제나 모여놀기 바빴던 기쁨조 친구들은 일시에 도우미로 전환했다. 혈소판 수치가 낮으면 환자는 생수나 날음식을 먹을 수 없다. 한 친구는 끓여 식힌 보리차를 나르고 호박죽을 쑤어 왔다. 선배는 아이의 수술날 불안에 떠는 친구의 손을 잡고 온종일 앉아 계셨다. 보조침대에서 자는 친구에게 스트레칭 요령을 가르친 친구, 발 마사지를 배워 친구에게 출장 서비스를 한 친구도 있었다. 나 역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솜씨지만 장조림을 만들고 계란말이를 부쳐 보리밥 도시락을 날랐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린 모두 기도하기 시작했다. 종교가 있는 친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생 종교 바깥에 사는 나도 서툴지만 매일 저녁 무릎꿇고 앉는다. 이 아름답고 불완전한 세계에 꽃으로 온 한 아이를 위해. 나는 믿는다. 친구들의 합체 에너지가 모여 우주의 어떤 선한 흐름에 가 닿을 것이라는 걸. 그 선한 에너지의 힘으로 아이가 다시 지상을 제 발로 걷고 뛰고 웃을 수 있을 것을 말이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는 누군가의 말, 아주 간절히 믿고 싶다.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