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0 여성살이 /
요즘 케이원(K1) 격투기 선수 최홍만의 경기가 재미있다. 치고받고 하는 스포츠라면 질색을 했던 나 자신도 놀랍다. 추석 연휴 때 스포츠 전문 케이블텔레비전에서 하루에 열 번씩 틀어주는 최홍만 베스트 경기를 피할 길 없어 잠깐씩 눈길만 주다가, 급기야 때리고 맞는 것이 전부인 격투기 경기를 꼬박 두시간이나 꼼짝 않고 지켜보게 됐다.
한국인의 영원한 콤플렉스였던 체격의 열세를 극복한 최홍만에 대한 한국 스포츠팬들의 열광도 이해할 만했다. 거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앞에서는 모든 인종이 아담 사이즈 아닌가? 게다가 씨름판에서 단련된 그가 ‘무릎찍기’ 같은 격투기 기술들을 사용해 상대방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모습도 생각보다 흥미진진했다.
무엇보다 재미있는 것은, 최홍만의 K1 경기는 인간의 물리력이라는 것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너무나 ‘착하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218㎝의 키와 150㉧이 넘는 몸무게를 이끌고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체력과 물리력의 폭력적인 카리스마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진 숱한 세월과 고통을 느끼게 한다. 몇 번의 주먹질만으로도 지쳐버릴 수밖에 없는 거대한 몸으로 눈앞의 사람을 향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은 정말이지 애처롭기까지 한 것이다. 몸집만큼이나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링 위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누구를 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거대한 몸을 어쩌지 못해 배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다 가끔, 상대에게 한방 맞고 나서 ‘괜찮다’는 몸짓을 취하며 순진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배시시 웃고 있는 그를 보면, 마치 ‘게임은 게임일 뿐이다’라며 나를 위로하는 듯해 감동하기까지 했다. 폭력이 난무하는 한판의 세련된 쇼가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한 인간의 스토리로 읽고 싶은 ‘치고받고’ 경기를 처음 구경한 셈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맞는 아픔’이 상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치고 받는’ 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맞으면 아프다’는 사실을 어떻게 견디면서 관람에 집중할 수 있는지 새삼 궁금하다. 경기는 그저 경기일 뿐이라고, 서로의 맨몸만으로 승부하는 정당한 게임이라고 여기는 것이 기본적인 관전 태도라는 것은 대충 알겠다. 주먹질하면서 친해지는 남성들의 연대 방식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런데 최홍만의 경기는 그것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또 다른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구도 가져본 적 없는 거대한 몸을 갖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아픔과 애환이 먼저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때려 부수고 파괴해서 굴복시키는 타고난 승자의 입장이 아니라, 맞아서 아프고 힘들어서 쓰러지는 자의 고통과, 그 고통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으려는 현재 진행형의 ‘의지’가 읽히는 것이다.
어쨌든, 최홍만이라는 거인으로 인해 나는 격투기를 때리는 자의 쾌감으로만 관람하지 않아도 충분히 재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맞고 때리는 스포츠가 재미있다니, 바야흐로 내가 변태를 하여 다른 인간형이 되어가는 것인지 두고 봐야겠다.
정박미경/자유기고가 chaos4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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