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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쑥뜸 보시하는 ‘은둔 여고수’ 시이모님

등록 2006-10-24 18:49

2050 여성살이 /

경주 교외 시댁 근처 고개 너머 외딴 골짜기 동네에 시이모님 한 분이 사신다. 원래 일산에 사셨는데 작년 봄 작은 집을 구해 이사를 오셨다. 올해 예순둘. 소생 없이 일찍 이혼하셨고 온 나라의 절을 순례하신 경력을 지닌 분이다. 처음에 동네 사람들은 호기심으로 외지에서 온 새 이웃의 집을 두드렸다. 곧 시이모님은 동네 모든 나이든 여성 농민들이 직업병인 등허리와 무릎 통증에 시달리는 걸 알게 되셨다. 보다 못해 쑥뜸을 놓아주기 시작하신 게 일년이 넘었다. 여러 절을 다니시면서 노스님들에게 쑥뜸을 익혔고 절에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시술해 가며 ‘임상’을 거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신 것이다. 대가를 받으면 무면허 의료행위가 되어 불법이다. 시이모님은 쑥뜸 재료까지 우편 주문으로 구입해 이웃들에게 쑥뜸 치료를 선물하셨다.

어느덧 그분의 집은 문턱이 닳아 없어질 지경. 오랜 허리 통증으로 구부정하게 걷던 이웃들이 직립으로 마을을 활보하고 있다. 체머리를 흔들던 할머니 한 분도 거의 완쾌되어 시이모님의 명성은 이제 ‘동네 편작’으로 격상되었다. 시이모님 자신은 젊은 날 다친 허리 때문에 걸음걸이가 부자유스럽다. 불편한 몸을 가지셨기에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 깊이 연민하시게 된 게 아닐까? 일찍이 서울의전을 다니셨고 한의학에도 관심이 많으셨던 친정아버님께 어린 시절 이미 체질 분류법과 혈의 위치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시이모님. 물론 그 뒤의 독학 내공이 결정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부항과 약초, 산나물에 대한 지식도 수준급. 우리가 밥상에서 날마다 먹는 음식, 특히 온갖 나물의 약리적 효과에 대해 전문가적 견해와 분석으로 우리를 압도하신다.

시이모님의 밤은 불경 읽기와 기도, 명상의 시간. 평생 사찰 순례를 다니셨기 때문일까, 모르긴 몰라도 그분의 재가 수행도 한 경지에 이르셨다고 생각된다. 아니 어쩌면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알고 계시는 것만 같다. 그 증거는 매사에 태연하고 모든 사람을 높낮이 없이 똑같이 대하시는 품새. 말수 적으신 시이모님은 그러나 가끔 세상에 가득 찬 탐욕과 애증, 분노와 절망에 대한 안쓰러움과 무력감을 한두마디 내비치신다. ‘슬픔에 잠긴 현자’의 시선으로. 결국 치료해야 할 것은 몸의 병뿐만이 아니라는 걸 긴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

시이모님은 언제나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이웃 할머니들과 막걸리잔을 나누고 찐고구마로 새참을 함께 하신다. 밤 12시가 넘건 말건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동네 이웃들에게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으시면서. 그분의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나는 알지 못한다. 때로 짜증스러운 무대의 여건에도 전혀 불평하지 않고 이번 생의 배역을 마치려는 배우처럼 그저 조용히 골짜기의 사계절을 바라보시는 시이모님. 그분을 대한민국 은둔 여고수의 반열에 올린다.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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