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여성

엄마는 ‘녹슨 투사’

등록 2008-02-21 20:34

김연/소설가
김연/소설가
2050 여성살이/

아래의 상황들은 맥락과 사건 발생 순서에 일관성이 없으므로 논리적인 글쓰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정신건강을 위해 넘겨주시기 바랍니다.

#1. 중학생이 된 딸애가 처음으로 친구들이랑 극장을 찾아 나섰다. 우리 읍내는 극장이 없는지라 춘천까지 버스를 타고 갔다. ‘읍’에서 놀던 아이들은 ‘시’에서 헤맸다. 그때 어떤 아주머니가 소녀들에게 다가왔다. 수상할 정도로 친절히 촌에서 온 소녀들을 극장 입구까지 데려다주었다.

#2. 인천국제공항 입국장. 눈이 빠지게 짐이 나오길 기다리다 갑자기 부르심을 받았다. 딸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볼 일을 보고 나오자 애가 우리 짐을 다 찾아서 수레에 올려놓았다. “너 혼자서 이 무거운 걸 어떻게 들었어?” “아냐, 어떤 아줌마가 도와줬어.”

#3. 몇 년 전, 건강보험관리공단 같은 데서 연락이 왔다. 무료 건강검진이 있단다. 아침도 거르고 읍내로 나갔다. 검사 전 이른바 물어보기. 70대의 할머니를 상대로 20대의 남자가 길거리에서 이것저것 묻는다. 초경은 언제 시작했느냐? 생리는 언제 끝났느냐? 담배는 피우느냐? 등등. 손자뻘의 남자한테 삶의 은밀함을 공개적으로 취조당하던 할머니가 웃으시더니 끝내 한마디 하신다. “참, 별걸 다 묻네. 왜 시집이라도 다시 보내 주려고?” 할머니 다음이었던 나에게도 같은 질문이 쏟아졌다. 집에 돌아와 하루치의 굴욕을 건강보험공단 게시판에 글을 남기는 것으로 보복했다. 정중한 사과와 함께 시정하겠다는 관계자의 답변을 받았다.

#4. 딸이 받아 온 중학교 입학 고지서 중에 ‘동창회비’란 게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뭐 친목도 도모하고 그러고 싶은 사람이 내는 게 동창회비라고 알고 있었다. 어찌 됐든 학교를 졸업해야 동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인 일로 입학생에게 동창회비가 의무사항? 학교를 비롯하여 담당 교육청 등등 여기저기 전화했다. 암초는 발밑에 있었다. “엄마, 그렇게 돈 없어? 동창회비 그냥 내지…” “이건 돈이 문제가 아니야. 입학생한테 동창회비라니 말이 안 되잖아.” “만날 돈이 문제가 아니래…” 조용한 입학생이 되길 원하는 딸의 바람을 무시하고 자칭 녹슨 투사인 어미는 끝내 동창회비를 내지 않았다.

#5. 작년 가을 뉴욕. 내 앞에 어그부츠를 신은 뉴요커가 걷고 있었다. 부츠의 끈이 풀려 거리를 쓸고 있었다. 말을 해 줄까 고민하다 세련된 뉴요커의 스타일을 문제 삼는 촌스러운 이방인은 되고 싶지 않아 관두었다. 다음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내 앞에서 벌어졌다. 그녀가 그만 신발끈에 걸려 차가운 거리 위에 나뒹군 것이다. 두고두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영어 울렁증을 핑계대며 알려주지 않은 내 탓인 듯하여. 점잔을 떨며 타인의 불행에 눈감으려했던 내 염치없음인 듯하여.


김연/소설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혐오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해
지금, 한겨레가 필요합니다.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