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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왕언니’가 있어야 할 곳

등록 2008-03-27 21:38

박어진/칼럼니스트
박어진/칼럼니스트
2050 여성살이/

30살이 되는 건 20대에겐 일대 사건이다. 사무실 후배 하나는 20대의 마지막 겨울을 다이어트로 자축하며 ‘기성세대 진입’ 충격을 달랬다. 수척해진 얼굴로 30살을 맞고 싶었단다. 30대 여성이라는 새로운 신분에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텐데, 어느새 오피스텔을 빌려 독립의 꿈을 이뤘다. 누드 크로키 과정에도 등록했다. 출판 기획자답게 일주일에 두세 권의 책을 읽는다. 다음은 남자 친구 만들기. 소개팅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머를 만나고 있는 중. 그냥 사귀기엔 무리가 없지만 결혼까지 생각하자면 고려할 사항이 너무 많단다. 그녀에게 급호감을 느끼고 있는 상대에게 진도를 더 나갈지 입장을 밝혀야 할텐데.

그녀 또래 사무실 후배들을 지켜보는 건 50대 왕언니인 나의 즐거운 특권이다. 퇴근 뒤 직장인 뮤지컬반에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맹훈련 중인 북 디자이너 현영씨가 있는가 하면, 플롯을 배우는 웹 디자이너 신욱씨도 있다. 각자의 방식으로 일과 삶 사이의 균형을 찾는 능력이 뛰어나다. 놀랍다. 나의 20대와 30대 시절엔 치명적으로 모자랐던 능력이었기 때문이다. 엄벙덤벙 흘려보냈던 젊은 날이 후회되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닌 나. 유능한 후배들을 보니 안심된다. 일처리도 똑소리가 난다. 전체 회의나 고객들과의 면담 때 잘 정돈된 언어로 발표하고 보고하는 그녀들의 모습에서 날마다 성장하는 것이 보인다. 화장이나 패션 코디에도 개성이 묻어난다. 은은하되 손톱이나 신발 선택에는 강조점을 두는 센스까지.

이쯤 되면 왕언니인 나의 입지가 불안하다.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다. 나의 20대 직장 시절, 40대나 50대 선배들은 엄청 우러러 보였다. 일과 인간관계의 모든 난제에 두루 명쾌한 방법을 제공하던 왕언니들의 황금시대가 있었으니. 지금의 내가 누릴 수 없는 멘토의 역할이었다고나 할까. 5학년 언니의 내공으로 축적한 삶의 지혜를 한 수 가르쳐 주겠다는 야심은 버린 지 오래다. 연애든 회사 인간관계든 전방위적으로 조언해 주고 싶은 왕언니 본능을 포기하기 어렵지만, 요청을 받아야만 입을 열기로 했다. 그러니 남은 건 후배들에게 밥 사주는 일뿐. 요즘 점심 시간, 나는 북어찜과 오징어볶음 덮밥을 앞에 두고 젊은 그녀들의 지혜와 라이프스타일을 엿듣기에 바쁘다. 무늬만 멘토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20대와 30대 때에 그랬듯 40대나 50대에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는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밖에는.

박어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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