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FC 위민 지소연이 18일 경기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WK리그 보은 상무와 경기에서 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수원/연합뉴스
지소연(31·수원FC위민)은 지난 18일 WK리그 보은 상무전을 치른 뒤 “제가 경기하면서 잘 안 떠는데 WK리그를 뛰게 되니 너무 긴장됐다”고 했다. 국가대표에서 139경기 65골(남녀 통합 A매치 최다 골), 잉글랜드 첼시에서 124경기 37골을 넣은 ‘월드클래스’의 국내 데뷔전 일성이었다. “너무 떨렸다”라고 고백하는 그의 얼굴은 잔뜩 상기돼 있었다.
지소연의 발자취는 눈부시다. 2008 국제축구연맹(FIFA) 17살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깜짝 8강 성적을 냈고, 2010년 20살 이하 여자월드컵에서는
한국을 3위에 올려놓으며 실버볼(최우수선수 2위)·실버슈(득점 2위)를 받았다. 19살에 한국 여자축구사를 바꿔버린 그는 이후 조소현, 이금민, 여민지 등과 황금세대의 간판으로 활약했다. 지소연과 함께 한국은 2015년 캐나다 여자월드컵 첫 16강을 달성했고 2019년 프랑스, 2023년 뉴질랜드-호주 대회까지 3연속 본선 진출을 이뤘다.
클럽팀에서도 성공 가도를 달렸다. 일본 INAC고베 레오네사에서 3년 동안 7개의 트로피를 들었고 2014년 잉글랜드 여자슈퍼리그(WSL) 첼시 위민 유니폼을 입으면서 한 단계 도약했다. 2013 세계클럽챔피언십 결승에서 지소연에게 일격을 당하며 고베에 패했던 적장
엠마 헤이워즈 첼시 감독은 “그(지소연)처럼 플레이하는 선수는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곧바로 캐스팅된 지소연은 이후 8년간 헤이워즈 감독 아래서 13개의 트로피를 따내며 여자슈퍼리그
최강 왕조를 구축했다.
첼시 시절 지소연이 지난 2020년 8월 영국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맨체스터 시티와의 2020 잉글랜드축구협회(FA) 여자 커뮤니티 실드에서 승리한 뒤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환호하고 있다. 런던/EPA 연합뉴스
지소연이 대양을 누비면서 겪은 것은 우승과 승리의 영광뿐이 아니었다. 그는 본인의 성장세만큼이나 가파른 여자축구 산업의 확장세를 한복판에서 목격했다. 그가 고베에 있던 2011년 일본은 여자월드컵 정상에 섰다. 이후 L리그(나데시코 리그)가
티브이 중계되기 시작했고 도요타 같은
대기업이 스폰서로 붙었다. 일본은 재작년 세미프로인 L리그 상위에 최초의 프로여자축구리그인 WE리그를 출범했다. 지소연이 속했던 고베는 초대 챔피언에 등극했다.
영국과 유럽의 바람은 더 거셌다. 여자슈퍼리그는
2018년부터 프로로 전환됐고, 이듬해 잉글랜드가 여자월드컵 4강에 오르자 <비비시>와 <스카이스포츠>가 리그
중계권을 사 갔다 . 공영방송을 통해 일부 경기가 공짜로 송출될 뿐이었던 8년 전에 비춰보면 격세지감이었다. 지난 5월 지소연의 첼시 고별전인 여자 FA컵 결승에는 4만9000명의 관중이 몰렸고, 지난 2일 잉글랜드의 우승으로 마무리된 여자 유로2022 축구선수권대회에는 57만여명의 관중이 들었다.
지소연이 지난해 11월 경기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여자축구 뉴질랜드의 친선경기에서 드리블 돌파를 시도하고 있다. 고양/연합뉴스
이 같은 체험은 여전히 전성기인 슈퍼스타에게 트로피 수집보다 중요한 동기를 부여했다. 일본·유럽과 비교하면 황무지나 다를 바 없는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건 협소한 여자축구 저변이다. 대한축구협회 자료를 보면 등록된 여자축구팀은 WK리그부터 초등학교까지 합쳐 지난해 기준 63개, 전문 선수는 올해 4월 기준 1358명에 불과하다. 선수만 81만여 명에 달하는 일본에 비하면 1000분의 1 수준이다. 이 여건을 그대로 두고 ‘넥스트 지소연’을 기다리는 일은 무용하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소연은 WK리그의 경기 시간부터 팬과의 소통, 마지막이 될 공산이 큰 내년 여자월드컵 결의까지 두루두루 언급하며 이적 소감보다는 출마 소감(?)에 가까울 열의를 드러냈다. 데뷔전에서는 K리그1 이승우의 춤 세리머니를 벤치마킹해 쇼맨십을 선보였고 관중 입장료를 본인이 부담하는 무료 관람 이벤트를 벌이기도 했다. 수원FC 관계자는 이날 “구단 최고기록인 1091명의 관중이 찾았고 팬숍에서는 약 500만원의 매출이 났다”고 전했다.
지소연이 지난 6월6일 서울월드컵경기장 보조구장에서 열린 2022 KFA 풋볼페스티벌 '레전드' 플레이그라운드 행사에서 축구 클리닉에 참가한 어린이들에게 패스와 드리블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연합뉴스
남다른 각오에 어깨가 무거울 법도 하지만 지소연의 말은 핵심을 아우르고 있었다. “예전부터 WK리그를 봐왔는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온 건 처음이다. 경기 전 선수들에게 ‘좋은 경기력을 보여드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희가 잘해야 (관중이) 계속 올 수 있지 않겠나.” 이날 그가 전은하, 김윤지, 타나카 메바에 등 동료들과 빚어낸 수원FC의 축구는 아름다웠다.
지소연을 ‘직관’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경기는 29일 구미스포츠토토와 세종에서 맞붙는 WK리그 18라운드, 그리고 9월3일 화성에서 열리는 자메이카와 대표팀 평가전이다.
박강수 기자
turn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