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기자
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그의 별명은 ‘슛도사’였다. 슛을 쐈다 하면 그물 안으로 쏙쏙 들어갔다. 특히 윗몸을 뒤로 제쳐 쏘는 페이드어웨이슛은 일품이었다. 대만에서는 ‘신사수’(神賜手)라 불렸다. 슛 솜씨에 얼마나 감탄했으면 ‘신이 내린 손’이라고 불렀을까.
이충희(48). 그 이름은 1980년대 한국농구의 대명사다. 그는 인천 송도중 1학년 때 농구공을 잡았다. 키가 150㎝에 불과했지만 소년 이충희는 “농구가 너무 재미있어서” 농구공을 놓을 수 없었다. 송도고를 졸업할 땐 스카우트의 표적이 됐다. 고려대 재학시절에는 지금도 깨지지 않은 49연승 대기록을 이끌었다. 농구대잔치에서 6년 연속 득점왕과 최우수선수상(MVP)을 세차례나 받았다. 통산 4000득점도 그가 처음으로 돌파했다.
그의 이름은 해외에도 퍼졌다. 1986년 스페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득점 2위에 올랐다. 키 180㎝ 동양인으로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스페인 프로팀과 미국프로농구(NBA) 댈러스 매버릭스 등에서 입단 제의까지 받았다. 하지만 그는 국내에 남아 농구 붐을 일으켰다.
1992년 은퇴한 뒤 대만 홍궈팀에 들어갔다. 대만 팬들은 존스컵 때마다 찾아오던 ‘신사수’에 열광했다. 그곳에서 다섯시즌 동안 팀을 세차례 정상에 올려놓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도 프로리그가 생겼기 때문이다. LG 초대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선수들의 비디오를 본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그는 수비에 승부를 걸었다. 스타선수 하나없는 팀을 정규리그 2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1999~2000시즌 7위로 추락하며 사퇴했다. 인생의 ‘쓴맛’이 시작됐다. 프로팀에서 감독을 뽑을 때마다 그는 언제나 1순위였다. 하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0순위가 돼야 뽑히려나 보다”라고 자조섞인 농담도 했다. 어느덧 7년…. 초등학생이던 쌍둥이 딸이 어느새 고3이 됐다. 최근 오리온스 감독 후보에 또 올랐다. 이번에도 1순위였다. 그는 “이번에도 떨어지면 영원히 아마추어 팀에 남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아이들이나 가르치려 했다”며 웃었다. 마침내 14일 오리온스 감독으로 선임됐다.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한편으론 기쁘고, 또 한편으론 부담된다”고 털어놨다. 농구계는 그의 복귀를 환영했다. 당장 코트에 활기가 넘칠 것으로 보인다. 화려한 스타플레이어에서 농구인생 밑바닥까지 경험한 ‘슛도사’에게 거는 기대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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