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허, 전 회장이 추천하셨다니, 거절할 수도 없고….” 서재 공개를 요구받은 송명근씨는 모든 것을 보여주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몇권 밖에 공개하지 않았다. 보여주고 싶어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 실제 천주교를 처음 믿기 시작한 고조의 함자를 확인하기 위해 족보를 보자고 했지만 그는 쌓인 책 앞에서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듯 망연자실해 했다.
고조-증조-조부모-본인 대이은 천주교
집안 귀한 책 슬금슬금 없어지면서 소명의식 발동
박물관 짓고 싶지만 눈요깃거리만 될까 아직…
눈 어둡기 전에 직접 자료화할 생각이에요
집안 귀한 책 슬금슬금 없어지면서 소명의식 발동
박물관 짓고 싶지만 눈요깃거리만 될까 아직…
눈 어둡기 전에 직접 자료화할 생각이에요
한국의 책쟁이들/⑨ 천주교 집안 4대손 송명근씨
책쟁이 치고 공간 고민 않는 이가 없다. 공간에 비해 책이 많아서다. 그 바탕에는 책의 늘어날 수 있음과 공간의 늘일 수 없음이란 물성이 대립한다. 하여, 책과 공간이 일치하는 행복한 순간 외에는 책의 놓임새는 곧 책과 공간의 투쟁사다. 책과 공간 사이에 시간이 끼이면서 벌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주름살처럼 불가항력 앞에서의 부질없음이 적실하게 드러난다.
송명근(55)씨 집은 가장인 그의 몫으로 할당된 공간이 가장 크다. 송씨 부부와 자녀 1남2녀, 그리고 어머니 등 6명이 거주하는 80평 가운데 25평이 송씨 전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그가 안내한 곳은 좁은 계단을 톺아올라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는 좁은 방이었다. 책쟁이의 웅장한 서재가 짠~ 하고 나타나려니 기대한 방문자라면 적잖이 실망한다. 견본으로 미리 준비해 둔 천주교 관련 고서 외에 <고서연구> 잡지 20여권이 책상 위에 놓여있을 뿐.
책들은 꼬깃꼬깃 숨어있었다. 쪽문으로 연결된 마루, 그 맞은 편 다락방, 층계참의 창고, 지하방 가구의 뒤쪽…. 지붕의 물매가 그대로 드러난 이층은 구석구석 여축없이 맞춤 책꽂이고 거기서 넘친 책은 이중 삼중으로 쌓였다. 원래 도르래를 달아 이중으로 운용했던 책꽂이는 그 앞에 책이 쌓이면서 도르래는 기능을 잃었고 그 뒤의 책들 역시 거풍한 지 오래다. 층계참 창고 안쪽은 빵빵한 책 마대가 겹으로 쌓여 천장에 닿았다. 문쪽 책꽂이의 책이 ‘마대 속 책은 이러려니’ 하는 표지다. 무정한 책은 아들방이라고 예외없어 가구로써 반을 갈라 그 뒤쪽을 차지했다. 책은 공용공간인 단련실과 주방 옆까지 몰려나왔다. 이처럼 분산된 책들이 흐트러져 보이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숱한 공간전쟁을 치른 ‘역전의 용사’의 손길이 덧입혀졌기 때문이다. 애초 할당한 공간에서 어떻게든 완결하려는 투지가 그것. 물론 넘치기 전 완벽할 정도로 공간을 요리한 솜씨 때문에 그 느낌을 두배다.
“만권 정도 됩니다. 천주교 2천권, 기독교 4천권, 시집 1천권, 기타 문학, 실용서 등등 해서 3천권?” 1980년대 대학 다닐 때부터 시작한 책사냥 치곤 적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런 낌새를 챘는지 송씨는 사모은 책이 주로 50년대 이전에 나온 것들이라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전체적으로 썩음썩음한 느낌을 주는 것은 그 탓이다. 들인 시간과 금액이 책 속의 세월만큼이나 녹록치 않을 것이다.
다락방·가구 뒤쪽…책 숨바꼭질
월급은 100% 고스란히 집에 가져다 바치고 보너스와 부수입은 자신의 몫으로 삼았다. 골프, 등산, 운동 외에 잡기가 없는 터, 남들이 술, 노름, 여색에 들일 돈을 책에다 쏟았다. 아내는 처음에는 탐탁찮아하다가 그가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쌓이면서 책탐을 묵인하게 되었다. 2004년 현대그룹 금융사에서 임원으로 퇴사하기까지 한해 800% 이상의 보너스를 20여년 동안 책과 맞바꾸었으니 대충 알 만하다. 송씨는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더라면 돈좀 벌었을 거라며 웃었다. 그의 책탐이 절제된 느낌을 주는 것은 깔끔한 정리 외에 수집분야를 특화하였기 때문. 주변에는 책을 좋아해 무절제하게 책을 사들이다 패가한 사람, 좋은 물건을 만나려는 욕심에 아예 장사꾼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있다. 그는 시세가 떨어졌다거나 남들이 중요하게 여긴다거나 해서 책을 사는 일을 자제했다. 대신 관심분야의 책은 값의 고하를 크게 따지지 않고 샀다. 놓쳐서 아쉬운 책은 기억이 없다. 그는 이를 두고 ‘중심잡기’라고 일렀다. “내가 수집한 책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오.” <서유견문>(유길준, ),(John w. Hodge, 서울 프레스, 1902) <법한자전>(샤를르 알레베크, 서울프레스, 1901), (Camille Imbault-huart, 파리 Imprimerie Nationale, 1888), (Griffis, 1885), (Adrien Launay, 파리외방선교회, 1895), <한국천주교회사>(달레) 1~3권, (Norbert Weber, 1915), (Maurice Courant, 1896) 1~3권, <성경직해>(Diaz, 최창현 옮김, 1892~1895) 1~9권, <성교감략>(Delaplace, 1883) 등 개화기에 나온 한국 또는 천주교 관련 자료들. 주로 인터넷으로 구입했다.
그가 가장 공들인 분야는 천주교 서적. 그 이면에는 집안 내력이 자리한다. 비교적 개방적인 강경에서 터잡은 송씨 집안은 외래종교를 받아들여 고조부 때부터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증조부 안드레아, 조부 아우구스티노, 아버지 베드로. 증조모 허수산나, 조모 이베로니카, 어머니 김글라라 등. 증조부 안드레아는 익산의 나바위 성소 신도회장을 지냈다. 할머니는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된 103인 가운데 한 분인 이명서(베드로, 1821~1866)를 낸 집안이다. 병인박해(1886) 때 전주 부근 성지동에서 다른 신도들과 함께 체포된 이베드로는 전주 감영에서 배교를 거부한 채 고문과 혹형을 당하고 교우 5명과 함께 참수돼 마흔 다섯 생을 마쳤다. 할머니의 오빠와 조카가 신부였고 송씨의 동생과 고종사촌 동생 역시 서품을 받았으며 외사촌 동생은 가톨릭대학 학생이다. 송씨의 세례명은 바오로.
천주교 2천권·기독교 4천권 등 만권
어려서 초기 천주교 책이 많았다고 기억하는 송씨는 어느 때부턴가 책이 슬금슬금 없어졌다고 말했다. 귀한 책이 있음을 알고 천주교신자라면서 접근해 한권 두권 집어간 것. 그가 책의 가치를 알고 끝물에 챙긴 것은 <성경직해> 1~9권, <성교감략>(1883, 납활자), <요리강령>(1910, 한기근 옮김, 뮈텔 감준), <천주성교공과>(1862~1864, 목판본), <성찰기략>(1864, 필사본, 다블뤼 지음) <성상경>(1900, 납활자) 등 10여종. 그것은 씨앗이 되어 2천여종의 천주교 선교 초기서적과 자료로 불어났다. 그런 점에서 송씨의 책탐은 옛 기억의 회복 또는 소명의식과 동의어다. 1992년에는 100여권을 엄선해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임대한 150여점의 사진·형구와 함께 청담성당에서 100주년 기념 전시회를 열었다. 그가 보유한 가장 오랜 천주교 관련 자료는 척사윤음. 사교에 미혹되지 말라는 임금님의 말씀이 담긴 이 책자는 1801, 1839, 1866, 1881년 네 차례 반포됐다. 그가 보여주는 기해년(1839) 및 신사년(1881) 윤음은 당시의 급박성과는 달리 정려한 금속활자체가 아름다웠다. 특히 뒷부분의 한글체는 슬플 정도로 미려해 탄성을 자아냈다.
1800년대 한글체 슬플 정도로 미려
“나도 까맣게 잊고 있었네” 하면서 두권짜리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12권짜리 <한국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2005), <한국성서백년사>(리진호, 대한기독교서회, 1996년) 등 공구서를 뒤져 각종 자료의 서지를 확인해 주었다. 무척 행복해 보였다. 공소를 순회하던 신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지메모, 1881년 신사윤음을 기초한 영의정 조인영의 필적을 펴보이는 손길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천주교 관련 초기의 책은 거의 다 모았다는 그는 박물관이 꿈이다. 부지를 제공하겠다는 지자체의 제의도 있었고, 스스로 땅을 찾아도 보았지만 아직은 아니다라는 결론이다. 소중한 자료가 단지 눈요깃거리로 전락하는 것이 마뜩찮을 뿐더러 책이 홀대받는 요즘 세태로 보아 과연 보러오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좋은 자료를 왜 독점하고 있냐”며 기증을 권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역시 소중하게 관리해 줄 지 미덥잖다. 절두산 박물관에 첫 세례자인 이승훈이 과거 급제자 명단으로 오른 <사마방목>을 임대해주는 정도에 그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한때 알바를 시켜 자료를 정리할까도 생각했지만 대학원에 진학해 스스로 연구를 하는 쪽을 고민하고 있다. 더 나이 들어 눈 어둡기 전에 어떻게든 자료화 해야겠는데…. 송씨는 초조해 보였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월급은 100% 고스란히 집에 가져다 바치고 보너스와 부수입은 자신의 몫으로 삼았다. 골프, 등산, 운동 외에 잡기가 없는 터, 남들이 술, 노름, 여색에 들일 돈을 책에다 쏟았다. 아내는 처음에는 탐탁찮아하다가 그가 허튼 짓을 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쌓이면서 책탐을 묵인하게 되었다. 2004년 현대그룹 금융사에서 임원으로 퇴사하기까지 한해 800% 이상의 보너스를 20여년 동안 책과 맞바꾸었으니 대충 알 만하다. 송씨는 그 돈을 부동산에 투자했더라면 돈좀 벌었을 거라며 웃었다. 그의 책탐이 절제된 느낌을 주는 것은 깔끔한 정리 외에 수집분야를 특화하였기 때문. 주변에는 책을 좋아해 무절제하게 책을 사들이다 패가한 사람, 좋은 물건을 만나려는 욕심에 아예 장사꾼으로 돌아선 사람들이 있다. 그는 시세가 떨어졌다거나 남들이 중요하게 여긴다거나 해서 책을 사는 일을 자제했다. 대신 관심분야의 책은 값의 고하를 크게 따지지 않고 샀다. 놓쳐서 아쉬운 책은 기억이 없다. 그는 이를 두고 ‘중심잡기’라고 일렀다. “내가 수집한 책들은 대략 이런 것들이오.” <서유견문>(유길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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