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가 독자에게
선생을 뵌 건 1977년 말 서울 현저동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78년 초인지도 모르겠다. 추운 날씨였는데, ‘출정’이라 했던가, 교도관들이 법원쪽에 조사받으러 나가는 ‘수인’들을 ‘법무부 차’에 태우기 전 포승줄로 묶어 줄을 세우고 있었다. 솜을 넣은, 색바랜 푸르딩딩한 무명 누비옷을 걸친 사람들 사이에 어쩌다 밖에서 넣어준 약식 한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선생은 우리처럼 푸른 옷이었고 칭칭감은 흰 포승줄이 선생의 양손을 허리춤 양쪽에 묶어놓고 있었다.
당시 유신반대 학내시위 주동 등으로 붙잡혀 들어간 다른 학생들처럼, 무슨 책을 주로 봤느냐는 검사의 다그침에 우리도 선생의 책과 글들을 줄줄이 읊었다. 우리는 아직 귀때기 새파란 스무살 남짓 풋내기들이었다. 구치소에 들어간 지 한달여 만에 우리는 책에서만 보던 선생을 그곳에서 뵀다. 잠깐이었지만.
전주교도소를 거쳐 다시 79년 봄 광주교도소로 이감됐을 때, 거기서 또 선생을 만났다. 교도관이 따라붙는, 사방 바로 바깥 담장속에서 하는 운동 시간이었는데, 먼저 나와 산보중이던 선생에게 들뜬 인사를 드렸다. 우리는 그해 7월17일 제헌절 특사로 풀려났고 선생은 남았다. 그 몇달 뒤 대통령이 살해당했다. 나라 안팎을 휩쓴 충격과 흥분과 불안속에 선생은 먹방에 보내져 22일간 ‘곱징역’을 살았다. 그리고 그해 말 ‘12·12 쿠데타’가 일어났고, 몇달 뒤 미처 피어나지도 못했던 ‘서울의 봄’은 ‘광주항쟁’과 함께 스러졌다.
선생을 다시 뵌 것은 88년 <한겨레> 창간 때였다. 서대문에서도 그랬고 광주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선생과는 언제나 잠깐씩 마주쳤을 뿐이다. 지난 주, 처음 뵌 지 30년만에 비로소 장시간 선생을 마주했다. 어느새 우리 나이 오십이 다됐고, 선생은 팔순이 가까왔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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