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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생에 나무였지 싶어요

등록 2006-09-28 20:27

목재상 김태석씨. 독서동아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아이 둘을 낳아 잘 산다. 현대판 나무꾼과 선녀는 보름날 연못 대신 책방에서, 옷이 아닌 책을 매개로 인연이 됐다. 그래서일까, 나무꾼의 사무실 비밀공간에는 인연의 매개인 책을 곱게 숨겨두었다. 김씨 가족. 첫아이 민걸은 사진찍기를 거절했다.
목재상 김태석씨. 독서동아리에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리고 아이 둘을 낳아 잘 산다. 현대판 나무꾼과 선녀는 보름날 연못 대신 책방에서, 옷이 아닌 책을 매개로 인연이 됐다. 그래서일까, 나무꾼의 사무실 비밀공간에는 인연의 매개인 책을 곱게 숨겨두었다. 김씨 가족. 첫아이 민걸은 사진찍기를 거절했다.
사무실 구석 빈 책꽂이 밀자 비밀공간
장르 망라한 책 4천여권 가지런히
“상처 치유하려, 고민 물어보려 책을 봤죠”
나무 팔아 몸의 양식을, 책 사들여 마음의 양식을

한국의 책쟁이들/⑩ 목재상 김태석씨

관악구 봉천6동, 봉천중앙시장 건너편 ‘봉천목재’. 전면의 유리를 흰필름으로 바른 사무실 안은 정통으로 받은 오후 햇볕이 물 속에서처럼 적막한 밝음으로 치환돼 있다. 그 탓일까. 자신은 목재상일 뿐 기삿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장 김태식(42)씨의 표정과 말투가 착 가라앉았다.

“86년 ‘그 사건’을 당한 뒤로 열 받아서 공부했어요.” 고교 졸업 뒤 성남시에 있던 제과회사 고려당의 빵공장을 다니던 그는 어느 날 아침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위장취업, 노조결성 등 노동운동이 활발했던 터, 그와 관련한 연행으로 추정하지만 그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격. 취조경관이 당시 노동운동가인 김문수를 아느냐고 물어왔을 때 “신문수요? 만화 그리고 있지 않아요?”라고 되물을 정도였으니…. 경관은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무식한 공돌이새끼라고 면박을 주었다. 풀려나서는 자괴감에 정관수술을 하려 했으나 병원에서 “젊은이가 왜 그러느냐”며 말렸다. 대학에 진학한 친구와 친절하게 금서목록을 실은 신문의 도움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전태일 평전>을 독파하고 <죽음을 넘어 시대를 넘어> <한국민중사> <세계철학사>를 거쳐 <자본론>으로 옮아갔다. ‘낮 장사, 밤 공부’ 몇 해가 지나자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이 잡히고 삶의 자세도 바뀌었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지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책들은 어디있지? 왼쪽 구석의 바퀴달린 빈 책꽂이를 밀어옮기자 비밀통로가 드러났다. 한발짝을 들여놓자 4천여권의 책이 잘 차려진 헌책방처럼 책꽂이에 빼곡했다. 정확히 4평인 사무실의 반. ‘낮장사 밤공부’ 겹살이 인생이 추리소설의 배경처럼 고스란히 구현돼 있다. 책들은 사회과학, 철학, 한국근대사, 시, 소설 등을 고루 망라돼 있어 콕 집어낼 만한 특징이 없다. 교양인이 되기 위한 고른 독서의 결과랄까.

저잣거리가 책이더라고요


그가 책쟁이인 동시에 목재상인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가 동의하든 않든. 나무는 펄프의 원료이고, 책은 종이에 활자가 박힌 것뿐이니, 두 가지 모두 죽은나무인 점에서 일치한다. 그는 나무를 팔아 몸의 양식을 마련하고 책을 사들여 마음의 양식을 준비하니 팔고사는 게 모두 이익이다. 이보다 더 남은 장사가 어디 있는가. “전생에 나무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의 독백이다.

하지만 그가 목재상이 된 계기를 보면 우연과 필연이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1988년 스물다섯 살, 빵공장을 그만두고 실업자였을 때 목재상을 하는 아버지가 사람을 구하는 동안 좀 도와달라고 하였다. 사람은 쉬이 구해지지 않았고 일년만 하겠다는 시한은 지금까지 18년 연장됐다. 아버지가 1990년 암으로 세상을 뜨지 않았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엉겁결에 사업을 맡았지만 정식으로 인수한 게 아무 것도 없다. 돈받을 게 있다는 사람들은 악착같았고 돈을 줄 게 있는 사람들은 “아버지한테 받아가라고 하라”고 했다. 자리잡기까지는 부도 등 몇 차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정확히 말해 건축업체, 인테리어업체에 목재를 공급하는 중간상인. 목재(원목, MDF, 몰딩) 외에, 합판, 건축자재(텍스, 석고보드)를 취급한다. 자재 주문량으로써 경기 동향을 알 수 있고 몇 해 앞을 내다보는 눈이 생겼다. 그가 백일 때부터 나무장사를 해온 아버지의 장부와 아들이 이어서 기록한 장부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경기의 성쇠가 드러난다. 수출품이었던 합판은 중국에서의 수입품이 되었고 그 많던 수입원목도 집성목이 상당부분 차지한다. 국산 원목은 문화재 복원 등 특별한 경우 외에는 쓰이지 않는다. 채산이 안 맞기 때문. 그는 부동산 경기의 시한을 10년 정도로 보았다. 중국 동향 역시 주목 대상이다. 거품이 꺼질 때의 여파는 한국에 걷잡을 수 없는 영향을 줄 것이라는 것. 나무를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나무 역시 그한테는 책이 아니겠는가.

“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더군요. 저자거리가 책이고 사람들이 책이었어요.” 책에서보다 저자의 사람들한테 배운 게 더 많다고 했다. 사람들한테 받은 상처를 치유하거나 잊으려 책을 보았고, 그 상처는 곧 지혜로 전환되었다. 뾰족하던 생각도 많이 바뀌었다. 육체노동이 아닌 입으로 먹고사는 복덕방 사람들을 싫어했는데 이제는 직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싫어하던 것과의 화해는 결혼하면서부터.

하이텔 독서동아리인 ‘분서갱유’에서 지금은 아내가 된 선진(34)씨를 만났다. 1999년에 채팅을 시작으로 신촌에서의 오프라인 모임에서 만나 2000년 11월 결혼했다. 주로 호남사람들한테 돈을 떼어 그들을 싫어했는데 전주사람인 선씨를 만나면서 ‘그들’과 화해했다. 부부의 공통점은 책을 좋아한다는 것. 아이를 낳기 전에는 생활비 대부분을 책을 사는데 쓸 정도로 공통점을 확인했다. 하지만 공통점은 거기까지.

독서동아리서 사랑 키워

남편은 사회과학, 철학, 역사에 관심이 많고 아내는 소설, 그 가운데 에스에프, 추리와 고전에 쏠려있다. 남편은 에스에프를 비현실적이고 소모적이라며 가치를 두지 않는다. 반면 근현대사 인물은 옆집 아저씨처럼 잘 안다. 목동 그의 집 거실 책꽂이는 헌책이 주류인 사무실과는 달리 새책들이 가득하다. 아래쪽은 페이버백의 소설, 위쪽은 사회과학, 역사, 철학 분야로 하드커버가 주다. 김씨는 박상륭 칸을 따로 둘 정도로 그의 팬이다. 소설을 싫어하지만 박상륭은 예외다. 부부의 접점은 박상륭 하나다. “서로 영역을 인정하는 거죠, 뭐.” 이들 부부는 ‘일치하는 부부’의 맞은편 ‘보완관계의 부부’다. 연애할 때 아내의 레포트 자료 조사와 구입은 남자 몫, 정리는 여자 몫이었다. <영국 노동계급의 역사>의 각주 자료를 찾아 읽을 정도라면서 남편자랑이다. 남편 역시 비슷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 미인이 많다면서 자신은 책으로써 땡을 잡았다고 말했다. 책을 좋아하면 미인을 얻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쁜 점은 단 한가지. 책을 잡으면 밤 늦도록 보는 바람에 아침을 잘 안 해준단다.

싫어하지만 화해하려는 나머지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의 피’ 돈이다. 화해하려 한다고 해서 화해가 되는 게 아닌 만큼 그의 노력은 여느 사람처럼 짝사랑일 터. ‘네가 장사꾼이냐 학생이냐’는 친구들의 지청구로 책 공간을 막아두었지만 <현금의 지배>(니알 퍼거슨) 외에 몇 권의 책이 사무공간에 나와있다. 마흔 넘어 경영책을 읽기 시작했다. 피터 드러커의 저서, ‘세이 노’ ‘브라운 스톤’ 등의 글을 열심히 읽는다. 서른 여섯 늦장가가 완전히 사람을 바꿔놓았다. “이래도 되나 싶어요.” 그는 일요일마다 도서관에 간다. 아내한테는 비밀이지만 평일에도 시간 나면 그리로 간다. 경제·경영 분야를 파고 있다. 책한테 고민거리를 묻는다. 큰 업체가 가격으로 밀고 들어와 대형화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현실. 투자를 해야 하나, 더 두고 봐야 하나? 근교에 땅도 알아보지만 아직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학력사회에서 그는 대학 진학하지 않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목재를 팔고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을 뿐더러 스스로 졸업장 못지 않는 자격을 갖췄다고 믿는다. 그러나 두 차례 씁쓸한 기억이 있다. 책을 보려고 국회도서관에 갔을 때 대학생이 아니라는 이유로 출입을 제지 당했다. 그곳과는 인연은 그것이 다다. 또 한차례 지금의 아내가 자신보다 학력이 높다며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물론 인연은 이어졌고 고부 사이도 더할 나위 없다. 책이 많아서 좋았던 점? 한참만에 떠올린 기억은 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일이다. 옆 병상에 누우신 분이 낯익다 싶더니 책에서 사진으로 본 이숭녕 선생이더라는 것. 대국어학자시라고 간호사들한테 귀띔하자 그분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고 ‘눈밝은’ 그도 덩달아 덕을 보았다.

아들과 대화하려 수학 정석 공부

그동안 세번 이사를 하고 보니 책짐이 여간 골치가 아니다. 앞으로 제대로 자리를 잡으며 오동나무 원목으로 책꽂이를 짤 생각이다. 거기다 500~1000권 정도만 꽂고 싶다. 만권서 삼대면 정승이 나온다고 아들한테 책을 물려줄까도 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좋은 책은 절판돼도 다시 나온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책을 잘 보관해 주는데 굳이 개인이 짐을 싸안고 살 필요가 있느냐는 것. 그래서 그는 서초동 중앙도서관을 자주 간다. 그리고 <수학의 정석>을 읽는다. 아이가 크면 그게 대화의 창구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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