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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라지는 것의 끄트머리 우체국은 책과 비슷해요”

등록 2006-11-02 21:14

서울 회사원에서 시골 우체국장이 된 조희봉씨. 헌책 마니아로 <전작주의자의 꿈>이란 책을 펴낸 그는 책에 파묻혀 사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올해 그는 옥수수를 까며 여름을 났다. 도회지에 고향의 맛을 전하는 옥수수처럼 책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체라고 본다.
서울 회사원에서 시골 우체국장이 된 조희봉씨. 헌책 마니아로 <전작주의자의 꿈>이란 책을 펴낸 그는 책에 파묻혀 사는 것이 꿈이다. 하지만 올해 그는 옥수수를 까며 여름을 났다. 도회지에 고향의 맛을 전하는 옥수수처럼 책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매체라고 본다.
‘낮 회사원 반 책벌레’ 생활하다 3년전 하향
책읽는 우체국장의 낭만을 꿈꿨지만
농산물 직송 판매로 손에 푸른물이 들었다
바쁜 나날은 같아도 두번째 삶 사니 행복
한국의 책쟁이들/⑫ 화청 상서 36살 우체국장 조희봉씨

그는 올해 옥수수 400접을 팔았다.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딱 한달 동안. 새벽 밭에서 따온 옥수수가 앞마당에 부려지면 직원들이 달려들어 껍질을 벗기고 다듬어 25개 들이 상자에 담아 당일 도시로 보낸다. 올해로 3년째. 옥수수 수확기에 그의 손은 푸른 물이 들었다.

조희봉씨는 우체국장이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우리나라 최북단 상서우체국. 춘천에서 50㎞ 북방 자동차로 45분 거리다. 옥수수, 벼, 감자 등을 재배하고 버섯, 산채 등 채취를 주업으로 하는 전형적인 강원도 산간 마을에 자리한 이 우체국은 마을주민과 바깥을 이어주는 창구다. 각종 편지와 소포가 매개, 예금과 보험이 통로다. 인근에 산재한 군부대 사병들에게는 떠나온 고향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하다.

조 국장은 졸업철이면 관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상장을 준다. 상위권 아이에게 주어지는 우체국장상은 시골 마을에서는 여전히 권위 있다. 시상 때마다 정장 차림이지만 아직도 쑥스럽다. 반백의 기관장 사회에서 서른여섯의 그는 도드라지기 때문이다. 그가 별정우체국인 상서우체국장이 된 것은 2004년 1월, 정년퇴직한 아버지 뒤를 이어서다. 전국에 730여개인 별정우체국은 1960년대 ‘1면 1우체국’ 시책에 따라 국고가 미치지 못하는 오지에 만들어진 일종의 사설우체국이다.

젊은 그가 국장이 되면서 돈이 되지 않던 옥수수가 이제는 농가의 짭짤한 수입원이 되었고 재배면적도 늘어났다. 그가 직접 밭을 돌며 옥수수를 꺾고 나르니 느른한 산촌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 옥수수로 시작한 농산물 판매는 쌀, 한과, 산머루술로 품목이 늘어났다. 청정농산물, 수확당일 배송의 이점을 살린 홍보와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도회인의 정서가 맞아 떨어졌다. 올해 시작한 쌀은 화천농협과 협조해 20㎏들이 1천여 포를 팔았다. 내년부터는 나물도 팔 생각이다. 예금을 유치하기 위해 관내 학교, 군부대를 돌며 홍보도 하고 큰 덩치 보험 상품은 직접 나섰다. 특히 장병들의 효도 소포는 군사우체국과 경쟁을 벌여 상당량을 유치했다.

네가 왜? 아버지는 무척 놀랐다


3년 전 조씨가 내려와서 우체국을 하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 아버지는 무척 놀랐다. 평소 고분고분하지 않을 뿐더러 저 잘난 맛에 살고 서울의 좋은 직장에 자리 잡은 상황에서 하향해 뒤를 잇겠다는 말이 황당했던 것은 당연.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쓰면서 딴 짓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냐, 30년 넘게 청춘을 바쳐 이룩한 자신의 분신을 말아먹진 않겠느냐, 라는 미덥잖은 시선이 따랐다. 사실 조씨도 쉬피 보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이 세상의 모든 길이/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때로 외로울때는/파도소리를 우표속에 그려넣거나/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생각한다.” 안도현의 <바닷가 우체국>이란 시처럼 서울에 있는 지인들도 그가 그렇게 사는 줄 안다.

하지만 세상일이 그리 만만한가. 서울에서보다 오히려 생존경쟁이 더 치열하다. 단 하나의 선택지. 이것 아니면 없다. 핑핑 돌아가는 서울로의 퇴로는 더는 없다. 워낙 흐름이 다르기 때문. 읽지 못할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만은 서울 직장생활 때와 흡사하다. ‘내가 왜 여기 있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안전지대를 떠나보지 못한 사람에 비하면 전혀 다른 두번 째 삶을 사는 자신은 무척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선머슴아 같은 신참국장 3년차, 이제는 제법 자리가 잡히고 아버지의 목소리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실적이 좋은 우체국에게 주는 상을 받아 제주도 포상관광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그가 과장 승진을 앞두고 6년 정도 다니다 때려치운 직장은 동부정보기술. 시스템 개발 판매, 컴퓨터 서버 등 전산기기 판매를 하는 전산 관련 아이티(IT) 업체다. 한해 평균 400억 어치의 물품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가운데 가방 속의 읽히지 않은 책처럼 그의 젊음도 먼지만 쌓여갔다. 잠재한 책에 대한 열병이 도진 것은 ‘숨은책’이라는 헌책 동아리를 알게 되면서부터. 대부분의 회원이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인 이 모임은 ‘벙개’를 통해 보고 싶은 책을 헌책방에서 싼값에 사고, 주말 밤을 새며 책 이야기를 나누는 마니아들의 동아리다. 처음 넥타이 차림으로 참석해 ‘뻘쭘하던’ 그가 두번 째 시삽을 맡게 된 것은 숨은 열병이 발현되면서 나이를 잊을 만큼 몰입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갈등을 빚던 실재와 정서가 일치되는 특별한 경험이었다”고 표현했다. 2년여 ‘낮 회사원, 밤 책벌레’의 이중생활은 <전작주의자의 꿈>이라는 단행본 출간으로 맺어졌다. ‘전작주의자’는 그가 처음으로 만들어낸 말로 한 작가의 모든 작품을 찾아서 완독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한놈만 패”라는 영화 <주유소습격사건>의 대사처럼.

이윤기 책 모두 따라읽고 주례 ‘협박’

조씨가 따라읽은 사람은 소설가 이윤기씨. <하늘의 문> <나비 넥타이> 등 창작소설로 시작한 그의 따라읽기는 번역본으로 확대돼 200여권을 모두 독파했다. 그렇게 하면서 작가 이윤기의 전모뿐 아니라 그의 눈을 통해 세상 이치까지 두루 읽게 됐다. 그 무렵 사내 커플의 사랑은 무르익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800자 원고지 10장에 빼곡히 사연을 적고 그동안 독파한 200여권의 이윤기 책 사진을 동봉해 반 협박편지를 띄웠다. 당신 아니면 주례설 사람이 없다며. 결혼식 며칠 전까지 답이 없어 포기하고 있던 차 이씨의 전화가 걸려왔다. “제가 12월9일 화천으로 내려가겠습니다.” 활자가 목소리로 되고 책 속에서 사람이 걸어 나오는 듯한 환각. “책과의 인연에서 더 이를 수 없는 극점이었다”는 게 조씨의 말이다. 소설가 이윤기는 주례 이윤기가 되었고 스승 이윤기가 되었다.

신접살림은 화천과 서울의 중간인 춘천에 차렸다. 북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사농동. 여느 집과 다르지 않은 한 아파트. 서재가 있고 두 벽면이 책꽂이인 점, 그리고 베란다가 책으로 그득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책을 싫어하진 않지만 넘치는 것을 싫어하는 아내 최호경씨는 책이 서재 밖으로 나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몰래 산 책은 화천의 우체국 관사에 쌓아두고 하루 한 봉지씩 슬며시 들여온다. ‘몰래’나 ‘슬며시’는 조씨한테만 해당할 따름이다. “다 알지만 어떡해요. 워낙 책을 좋아하는 걸요.” 최씨의 말이다. 책꽂이에는 헌책방을 무수히 쏘다닌 자의 흔적이 없다. “새 책을 제값 주고 사서 읽는 사람처럼 바보는 없습니다. 두세 달만 기다리면 반드시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거든요.” 그는 출판의 흐름에 맞춰 신간들을 꾸준히 섭렵한다. 단 두세 달이 늦을 뿐이다.

그의 따라읽기는 김병익, 김원우, 고종석 등으로 이어지고 외국작가로는 스티븐 킹, 딘 쿤츠를 거쳐 요즘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 빠져 있다. “우리나라 소설은 개인 체험이나 내적인 갈등 위주의 정서에 머물고 있지만 일본 미스터리는 인간 내면의 추악한 밑바탕까지 파고들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한 대사회적 발언의 수위도 굉장히 높아요.” 그는 미야베 미유키의 <이유>, 기리노 나츠오의 <아웃>을 높이 평가한다. <이유>는 일가족 살해사건의 비밀을 캐가는 이야기인데 더불어 부동산, 교육문제 등을 짚어 일본에서 ‘현대의 발자크’라는 평을 받는다. 또 <아웃>은 도시락 공장에 다니는 네 여자 중 한 명이 남편을 살해하면서 빚어지는 이야기로 페미니즘 문제를 담고 있다. 잔혹한 장면의 세밀한 묘사는 도저히 여성작가가 썼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적실하다. “읽고 난 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어요.” 다카무라 가오루의 <마크스의 산> <석양에 빛나는 감>,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 등 스쳐 지나쳤던 책을 다시 읽고 있다. 70, 80년대에 번역된 책은 당시 우리나라 독자들의 시선을 벗어나 있었다. 2, 3년 전부터 각광받기 시작한 일본 미스터리는 헌책 마니아들 사이에 잠복했던 ‘어두운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일본미스터리문학즐기기’, ‘하우미스터리닷컴’ 등 동호회 붐이 일고 <화차> <아웃> 등 판이 끊긴 책들이 다시 나올 예정이다. “영국 미국에서 태동해 일본에서 엄청난 흐름을 보였던 추리, 미스터리 소설이 우리만 비껴갔던 거죠. 존 그리샴, 로빈 쿡, 영화 시에스아이(CSI) 시리즈 등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그는 본격소설과 장르소설이 이분화된 한국이 특이한 상황이라면서 조만간 그 경계가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일본 추리물 ‘어두운 열정’ 불러

책 읽는 우체국장, 아니 책을 계속 읽고자 하는 시골 우체국장. “사라지는 것의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인터넷으로 말미암아 절대 매체였던 책이 나이 든 사람의 구식 매체로 밀리고, 유일한 소식통이던 우체국은 전자우편에 밀려 디엠이나 고지서를 배달하는 곳으로 전락한 즈음, 조씨는 그 두 가지를 겸하고 있는 셈이다. 더군다나 서울의 원심력에서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서. “우체국은 도시와 농촌을 잇는 소중한 통로이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책과 비슷해요.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지만 누군가 지켜야하지 않겠어요?” 불임 종자가 횡행하는 가운데 강원도 집집이 튼실한 옥수수 종자를 품듯 책 읽는 조씨의 우체국도 우리네 삶의 건강한 원초를 품고 있다.

춘천/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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