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네이버 직원이 업무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같은달 31일 이 직원을 추모하는 공간이 회사 로비에 마련됐다. 성남/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회사는 직원들이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도와줄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제가 우리 고객과 우리 직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
양대 포털기업을 배경으로 한 2019년 <티브이엔>(tvN) 드라마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에서 업계 2위 ‘바로’의 대표 브라이언(권해효 분)은 대한민국 벤처 1세대 거물로, 수평적인 리더십을 발휘해 직원들의 신뢰를 받는 인물로 묘사된다.
반면 현실세계의 ‘브라이언’(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의 사내 이름)은 올해 초 20대 자녀에게
‘재벌식 승계’를 추진한다는 의혹을 받은 데 이어 최근 상시적 초과근로 등 회사의 무더기
근로기준법 위반 사실이 드러나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기존 재벌과는 다른 면모를 보일 것이라는 기대를 받아온 ‘벤처 1세대’ 기업들의 감춰진 민낯이 잇따라 드러나고 있다. 올해 초엔 주요 정보기술(IT) 기업 중심으로 성과 보상과 인사평가를 둘러싼 내부 갈등이, 최근에는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자살 사건(네이버)과 ‘리부트팀’(대기발령자)의 고용 불안(넥슨) 논란이 일고 있다.
급격히 몸집이 커진 데 따른 ‘성장통’이라는 시각과 함께 학연 등에 기반한 창업자와 그의 핵심 그룹이 주요 의사 결정을 사실상 독식하는 위계적 지배구조에 문제의 뿌리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해진 네이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 연합뉴스
아이티 업계에선 최근 네이버에서 벌어진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한 개인의 일탈이 아닌 구조적 문제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가해자의 지속적인 괴롭힘은 경영진의 ‘봐주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다. 그 배경엔 서울대 출신 동갑내기(1971년생) 임원들 간의 ‘특수 관계’가 자리잡고 있다.
실제 다수 임직원의 반대에도 과거 같은 문제를 일으킨 임원 ㄱ씨(가해자)의 재입사를 강행하고, 이후 직장 내 괴롭힘 사실을 보고받았으면서도 이를 묵살한 것으로 알려진 최고경영진(C레벨) ㄴ씨는 이해진 창업자 겸 글로벌투자책임자(GIO)의 ‘복심’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네이버 초기 멤버에다 서울대 선후배 관계이기도 하다. ㄱ씨와도 서울대 동문이다. 혈연 중심의 총수 일가가 경영을 쥐락펴락하는 옛 재벌과는 다르지만, 아이티 업계에는 학연에 기초한 순혈주의가 팽배해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네이버의 성장 과정을 20년 가까이 지켜본 한 인사는 “회사는 무리를 해서라도 프로젝트를 끝낼 수 있는 사람(ㄱ씨)에게 힘을 실어줬을 것이다. 다른 직원들이 반대 목소리를 내도 특정 임원(ㄴ씨)의 힘이 지나치게 세서 이 목소리를 무시하고 갈 정도로 조직이 경직됐다”며 “초기에는 헤드급 인력을 외부에서 충원했지만, 이젠 내부 사람을 키워서 쓴다. 그러다 보니 경영진이 의사결정을 할 때 집단사고의 위험에 빠지고 이에 직원들의 반발은 더욱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이 지난해 11월 경기도 판교 지역 아이티 기업 종사자 809명을 설문조사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절반에 가까운 47.3%(383명)가 ‘직장 내 괴롭힘을 경험하거나 목격했다’고 답했다. 서승욱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노조 카카오지회장은 “개인의 일탈로 보기엔, 업계 전반에 사례가 많다. 다른 아이티 기업 직원들까지 추모에 나서는 등 공감대가 형성된 이유도 직접 보고, 경험한 것들이 있어서다”라고 설명했다.
“가장 좋았던 건 사원과 실장(팀장) 사이에도 정말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었던 거예요.” 2007년 엔에이치엔(NHN) 시절 입사해 15년가량 네이버에서 근무 중인 ㄷ씨는 네이버가 ‘한국의 구글’로 불렸던 2000년대 후반 무렵을 이렇게 회상했다. 2007년은 직원 수가 한해 전 1500명대에서 2200여명까지 늘고 시가총액도 9조원을 돌파한 해다. 현재 시총 59조4천억원(3일 종가 기준)에 비춰보면, 14년 간 기업가치는 6배가량 성장했다.
ㄷ씨를 포함해 10년 이상 근무한 복수의 직원들 얘기를 들어보면, 네이버의 조직문화는 2013~2014년을 기점으로 수직적·폐쇄적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터닝 포인트가 있었다는 얘기다. 올해 초 불거진 성과급 기준 논란도 이와 관련이 깊다. 네이버 직원 ㄹ씨는 “입사 초(2000년대 후반)에는 ‘올해의 베스트 조직’이 공지됐고, 개인의 업무평가 결과도 나왔다. 그러나 2014년 이후엔 내가 성과급 수준을 가늠할 만한 모든 지표가 없어졌다”고 말했다. “조직장이 ‘올해 잘 챙겨줬다’고 말해도 객관적 위치를 (직원들은) 모르니 ‘줄 잘 서는 사람만 좋은 평가를 받는다’는 분위기가 회사 내에 만연해요.” ㄹ씨의 하소연이다.
또 다른 직원 ㅁ씨도 “2013~2014년께부터 인트라넷에 한달에 두차례 정도 공개됐던 노사협의회 회의록이 올라오지 않았다. 익명게시판도 사라졌다. 직원들 입장에선 ‘경영진 결정에 토달지 마라’는 뜻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귀띔했다.
수시로 옮겨 다니는 직원들 “경영진의 직원 통제만 강화돼”
카카오의 경우 2018년 1월 여민수·조수용 공동대표가 들어서면서 과거의 수평적 문화가 점차 사라졌다는 얘기가 나온다. 2008년에 입사한 서승욱 카카오지회장은 “2014년 10월 다음과 카카오가 합병한 직후만 해도 김범수 의장이 사내 시스템을 통해 직원들과 직접 소통하고 타운홀 미팅에도 자주 참석했다”고 했다. 이런 기조는 2015년 당시 만 35살에 최고경영자(CEO)가 됐던 임지훈 전 대표 시절까지는 어느 정도 이어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카카오는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인수합병과 분사 전략을 펴 국내 계열회사 수가 2018년 말 65개에서 2020년 105개로 2년여 만에 두배 가까이 늘었다.
카카오는 매주 금요일마다 조직개편을 발표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조직이 생겼다 사라지며, 그에 따라 매주 팀을 옮겨 다니는 임직원도 있다. 직군별로 ‘개발자 조직’, ‘기획자 조직’ 등을 두고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면 그때그때 필요 인력을 해당 팀에 배치하는 ‘기능별 조직’ 시스템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서 지회장은 “회사는 인력에 대한 고려 보단 사업적인 면을 우선해 마구잡이식으로 조직개편이나 인수합병을 결정하는데, 직원들은 여기에 대응할 수단이 없다. 직원에 대한 경영진의 통제가 계속 강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창민 한양대 교수(경영학)는 “규모가 작은 벤처기업일 때는 최고경영자 한 명의 생각과 조직문화로 회사가 운영될 수 있지만, 현재의 네이버·카카오는 그 단계를 넘어섰음에도 여전히 (핵심 경영진이) ‘벤처 마인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지배구조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며 “위계적 구조를 해소하려면, 조직장 등에게 일정 부분 권한을 위임하는 식의 재조직화나 인사평가 시스템의 투명화·객관화 작업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
선담은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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