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2일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방의 친러 공화국들을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병력 투입을 발표한 것을 미국이 침공으로 규정하고 경제 제재를 발동하면서 ‘실력 행사’ 국면이 펼쳐지고 있다. 러시아가 키우는 ‘군사적 공포’에 미국은 ‘경제적 공포’로 맞서며 상황이 악화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2일(현지시각), 전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발표를 “우크라이나 침공 개시”로 규정하고 러시아 국채의 거래 제한 강화 등 직접 제재를 선언했다. 미국 재무부는 미국 투자자들이 3월1일 이후 발행되는 러시아 국채를 유통시장(2차 시장)에서 거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앞서 미국은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이후 달러 표시 러시아 국채의 거래 금지, 투자은행들의 비루블 표시 채권의 발행시장(1차 시장) 거래 금지를 시행해왔다.
미국은 대외경제개발은행 및 러시아군과 연계된 프롬스뱌지은행에 대해 미국 내 자산 동결 등의 제재도 시행한다고 밝혔다. 또 푸틴 대통령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러시아 유력자 몇몇도 제재 대상에 넣었다. 유럽연합(EU), 영국, 일본, 캐나다도 러시아 금융기관과 개인에 대한 동시다발적 제재를 발표했다. 앞서 독일 정부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사업인 노르트스트림2의 승인 절차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대치 상황이 격화되자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24일로 예정됐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의 회담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 회담에서 준비될 것으로 기대되던 미-러 정상회담도 적어도 당분간은 추진할 수 없게 됐다.
푸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잇따라 실력을 행사하는 조처를 내놓으며 우크라이나 사태 해법을 놓고 미-러는 ‘대화’ 대신 ‘행동’에 나서는 극도로 위험한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러시아는 미국이 정한 금지선을 넘으면서 “최근 몇년 동안 세계 평화와 안보에 가장 큰 위기”(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과 유럽 주요국의 제재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방의 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에 군을 투입해 미국 등의 의지를 시험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푸틴 대통령은 18일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극초음속 미사일 지르콘 등을 발사하며 냉전 때를 방불케 하는 위기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에 맞서는 미국은 러시아의 지난 결정을 ‘침공’으로 규정하며 동맹국들과 함께 처음으로 제재를 단행했다. 위협이 빈말이 아님을 과시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러시아의 행위는 “국제법의 노골적 위반”이며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큰 덩어리를 잘라내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은 2014년 이후 크림반도 합병, 정적 암살 등 인권 탄압, 시리아 정부군 지원 등을 이유로 제재를 부과해 러시아 경제를 압박해왔다. 푸틴 대통령이 돈바스에 대한 병력 투입을 발표한 21일 러시아 주가지수가 10% 넘게 폭락한 것도 제재의 잠재적 위력을 보여준다. 미국 관리들은 전면적 제재가 가해지면 러시아의 물가상승률이 10%대로 치솟고 푸틴 대통령한테서 민심이 떠날 것이라고 경고해왔다.
아직 양쪽은 각자의 카드를 일부만 쓴 상태다. <로이터> 통신은 미국의 이번 러시아 은행 제재에 대해 “러시아라는 요새 표면에 입힌 찰과상 정도”라고 평가했다. 미국이 내내 경고한 “신속하고 가혹한” 제재 중 ‘신속한’ 제재만 가해진 것이다. 미국이 시사해온 제재 중에는 국제 결제망인 스위프트(SWIFT)에서 러시아 은행들을 퇴출하는 게 가장 강력한 조처로 꼽힌다. 200여개국 1만1천여개 금융기관이 가입한 결제망에서 배제당하면 러시아 금융권에 큰 혼란이 불가피하다. 미국은 반도체 수출 금지도 거론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22일 당장 러시아군을 돈바스로 보내지는 않고 “상황을 보겠다”는 말로 일단 한숨을 고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진짜 의도가 ‘전면전인지, 부분 점령인지, 위협에 그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 자체가 상대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무기’로 꼽힌다.
한층 엄혹해진 상황 변화 속에서 미국·유럽과 러시아가 ‘군사적 공포’와 ‘경제적 공포’의 크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디까지 감내할지가 이번 사태의 귀추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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