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러시아의 침공 이후 삶의 터전을 버리고 탈출한 우크라이나인들은 현재(5일 기준) 130만명을 넘는 것으로 집계된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18∼60살 남성들에게 징집령을 내린 상태라, 여성과 어린이 등이 대부분인 난민들은 극도의 공포와 불안 속에서 기차로 자동차로 또는 걸어서 폴란드·헝가리·몰도바·루마니아·슬로바키아 등 이웃 나라의 국경을 넘었다. 김혜윤·노지원 두 기자가 유럽의 우크라이나 접경지로 급파돼 정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사연과 전쟁의 참상을 전한다.
엄마와 함께 우크라이나에서 열차를 타고 온 비르만드(3·오른쪽)와 로마드(2)가 5일(현지시각) 저녁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의 여성·어린이 전용 대기실에서 벽에 붙인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바르샤바/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5일(현지시각) 밤 9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중앙역 2층. 유리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으로 의료진이 우르르 몰려갔다. 의사·간호사 및 봉사자들 6명이 너덧살 돼 보이는 남자아이를 바닥에 눕혔다. 다리를 심장 위로 향하게 한 뒤 아이의 손가락에 산소포화도 측정기를 꽂았다. 아이의 엄마는 창백한 낯빛으로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곁에 있던 다른 여성이 엄마가 안고 있던 딸을 대신 안아 올렸다. 몇분이나 흘렀을까. 울먹이던 엄마가 아들에게 말을 걸자, 아이는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고개를 조금씩 움직인다. 엄마는 아이를 일으켜 물을 먹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방금 아픈 아이 상태를 확인했어요. 코로나에 걸렸을지 어떻게 알겠어요? 이제 좀 괜찮은가 보네요. 봉사를 자원한 의료진들이 역사를 돌아다니면서 난민들의 건강 상태를 체크합니다.” 유리방에서 만난 폴란드인 봉사자 야누스(39)도 한숨 돌린 기색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딱 열하루 지났지만, 지금까지 폴란드에 도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75만여명을 훌쩍 넘겼다. 이런 추세라면 곧 100만명을 넘길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워낙 많은 난민이 폭증하자, 사흘 전인 지난 3일 중앙역사엔 우크라이나에서 피난 온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작은 공간(약 200㎡)이 마련됐다. 전쟁으로 충격을 받은 이들이 조금이나마 마음 놓고 쉴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곳에서 엄마와 아이들은 거처를 제공할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길면 하루를 꼬박 넘기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는 24시간 이내에 지낼 곳을 찾는다. 폴란드 시민들이 찾아와 ‘엄마와 아이 두 명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세요’ 하는 식으로 제안하면 조건에 맞는 이들이 따라나선다. 하지만 공간이 작아 사람들이 나가기가 무섭게 또 다른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전쟁은 이들의 삶을 하루아침에 바꿔놓았지만, 적어도 유리방엔 ‘평화’가 있다. 아기용 침대가 곳곳에 놓였고 바닥엔 장난감과 색연필이 굴러다녔다. 두세살 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는 담요 더미 속에 파묻혀 곤히 잠들었다. 한쪽 벽에는 아이들이 색연필로 그린 그림들이 붙었다. 그림 앞에 선 아이들은 영문을 모른 채 카메라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유리방 한 모퉁이엔 폴란드 시민들이 가져다 놓은 10여 가지 종류의 기저귀들이 선반 가득 쌓여 있었다. 물티슈·휴지 등 생필품은 물론 우유·분유에 빵과 저장용 식품, 사탕과 젤리 그리고 과일까지 아이와 엄마가 먹고 마실 것으로 가득했다. 또 한쪽엔 유모차와 아이들을 위한 옷가지들이 탑처럼 쌓였다. 취재진이 유리방을 둘러보는 동안, 또 한 시민이 커다란 쇼핑백 한가득 어린이용 물품을 들고 왔다.
상황을 설명하던 야누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슬픕니다. 너무 슬퍼요. 이게 전쟁의 참상입니다. 러시아는 뭘 더 원하나요? 아무도 러시아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5일(현지시각) 저녁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이 자원봉사자들과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들로 북적이고 있다. 바르샤바/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중앙역 곳곳엔 이들을 위해 시민들이 보내온 구호물자가 즐비했다. 탁자를 여러개 붙여 만든 ‘임시 배식대’ 근처에선 훈훈한 음식 냄새가 풍겼다. 배식대엔 비닐로 일일이 포장한 빵이 상자째 놓였고 그 옆엔 물과 커피, 음료수, 비스킷, 초콜릿과 함께 플라스틱 용기에 개별 포장된 수프가 가지런하게 놓였다. 테이블 아래엔 사과·귤 등 과일이 담긴 박스도 여럿이었다. 배식대에 선 폴란드 시민들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폴란드 요리와 팬케이크·소시지를 나눠줬다. 패딩 점퍼에 털모자를 귀까지 내려쓴 여성, 커다란 가방을 들쳐멘 남성, 유모차를 끌고 온 부모들은 일회용 접시에 따뜻한 음식을 챙겨 잠시 앉을 만한 곳, 접시를 내려놓을 만한 곳을 찾아 흩어졌다. 근심 가득한 얼굴, 한결 편안해진 얼굴, 발갛게 열이 오른 얼굴이 한데 뒤섞여 빈 속을 채웠다.
중앙역 2층 공간도 난민들과 이들의 소지품이 담긴 가방, 뚱뚱한 비닐봉지로 꽉 찼다. 한 여성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먹을 것을 씹었고 그 옆에 앉은 가족들은 옹기종기 모여 말을 주고받았다. 초등학교 저학년쯤 돼 보이는 한 소녀는 얌전하게 웅크린 회색 고양이를 옆에 두고 태블릿 피시로 유튜브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일부 난민들은 두꺼운 패딩 점퍼도 추위를 막기에 모자란지 담요를 다리에 감싼 채 바닥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담요와 침낭으로 만들어진 간이침대가 벽을 채웠다. 담요를 얼굴까지 덮은 채 홀로 누운 이들도 있고, 친구와 딱 붙어 온기를 나누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차가운 철제 벤치 위 매트와 담요를 겹겹이 깔고 앉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역사에 머무는 난민 대부분은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한 교통편이나 잠잘 곳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중앙역 1층에서 20명 가까이 되는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기차역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저기 폴란드 사람이 와서 사람들을 데려가네요.” 옆에 있던 한 봉사자가 설명했다. “폴란드 사람들이 생업을 멈추고 피난민들을 돕고 있어요. 가령 호텔 주인들은 영업을 중단하고 빈방을 우크라이나 사람들에게 내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일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5일(현지시각) 저녁 폴란드 바르샤바 중앙역에 우크라이나에서 온 난민들이 자리를 깔고 누워있다. 바르샤바/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우크라이나 다음엔 우리 폴란드 차례가 될 수도 있어요”
“혹시 어디까지 가세요? 곧 독일행 버스가 출발합니다.”
형광 조끼를 입은 키 큰 여성이 취재진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폴란드 대학생 사비나(19)였다. 사비나가 소속된 봉사단의 역할 가운데 하나는 흑인이나 중동 출신 등 비우크라이나인(Non Ukrainian) 소수자들의 교통편을 구해주는 일이다. 이들 비우크라이나인 피난민 중 상당수의 최종 목적지는 독일이다. 바르샤바에서 베를린까지는 차량으로 8시간 거리. 사비나와 그의 동갑 친구 올라는 난민 가운데 차별받을 가능성이 있는 소수자들이 버스를 탈 수 있게 돕고 있다. 봉사자들은 난민이 독일행 버스에 몸을 싣기 전 코로나19 검사를 할 수 있도록 키트도 나눠준다.
밤늦도록 왜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느냐고 묻자 사비나가 답했다. “처음 전쟁이 시작됐을 때 다들 불안해했어요. ‘젠장, 이다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라고요. 푸틴이 모든 사람을 위협하고 있어요. 그가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이다음이 우리가 될 수도 있잖아요. 무력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돕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어요.”
전쟁 발발 이튿날인 지난달 25일 페이스북에 개설된 우크라이나-폴란드 수송단(Grupa transport-UA/PL)에는 현재 2만6000명이 가입한 상태다. 교통편이 필요한 난민들과 차편을 제공할 수 있는 폴란드 사람들이 글을 올려 짝을 짓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폴란드에서 가장 큰 교통수단 안내 그룹인데요. 우리 친구들 7명이 먹지도 자지도 않고 밤낮으로 이걸 운영하고 있어요.” 사비나와 올라의 얼굴에 자부심이 서렸다.
비록 폴란드 시민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기다림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난민들은 오늘도 버스를 기다리고, 집을 기다리고, 전쟁이 끝나길 기다린다.
바르샤바/노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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