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태국 수도 방콕 주재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인권단체 활동가들이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는 촛불 집회를 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태국 지부 누리집 갈무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군주제 유지를 놓고 대립하는 태국 국내 정치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군주제 유지를 주장하는 왕당파와 폐지 또는 전면 개혁을 요구하는 민주화 진영이 상반된 주장을 내놓으며 팽팽해 맞서는 모습이다.
13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의 보도를 종합하면, 이른바 ‘노란 셔츠’로 불리는 보수 왕당파는 우크라이나 전쟁 개전 초기부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적극 지지했다. 대표적 군주제 옹호단체인 ‘타이무브’의 페이스북 계정에는 러시아를 압박하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고, “제재 뒤 러시아의 석유 수출이 되레 늘었다”는 출처가 불분명한 글들이 넘쳐난다.
이 단체는 ‘중립’을 추구해 온 핀란드와 스웨덴이 러시아의 침공 이후 나토 가입을 추진하자, “유럽의 안정이 위태로워질 것”이란 러시아 쪽 일방적 주장도 연일 올리고 있다. 언론에 푸틴 대통령을 비판하는 글을 기고한 유명 학자에 대해선 “미 중앙정보국(CIA)에 매수됐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민간인 살해에 사용된 무기를 확인해 보니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군이 사용하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가짜 뉴스’까지 버젓이 게시돼 있다.
친왕실·친군부를 자처하는 이들의 행태를 두고 신문은 전문가의 말을 따 “태국 왕당파는 자신들의 기득권은 물론 태국의 주권을 위협할 수 있는 미국의 개입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며 “푸틴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행보와 러시아의 전통적 가치와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모습에 공감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전했다.
이런 입장은 태국의 외교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태국은 지난달 2일 법적 구속력이 없는 유엔 총회의 러시아 비난 결의안에는 찬성표를 던졌지만, 7일 러시아의 인권이사회 이사국 자격 정지 결의안 표결 때는 기권했다. 당시 유엔 주재 태국 대표부는 성명을 내어 “우크라이나의 인도적 위기 상황에 대해 깊이 우려한다”면서도, “유엔 기구에서 특정 국가의 지위를 정지시키는 문제는 결코 가볍게 처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면 야당인 전진당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진영에선 러시아의 침공을 비판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명확한 지지 입장을 밝힐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전진당은 푸라윳 찬-오차 현 총리 집권의 문을 연 2014년 군사 쿠데타를 앞장서 비판하고, 태국 형법 112조(왕실모독죄) 폐지를 촉구해왔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한 청년활동가의 말을 따 “독재와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게 되면, 다른 곳에서 똑같은 투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전했다. 이 신문은 현지 전문가의 말을 따 “왕당파도, 민주화 세력도 민주주의와 권위주의에 대한 자신들의 관점을 우크라이나 사태에 투영시키고 있다”고 짚었다.
정인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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