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예비군 훈련장을 방문해 점검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장관. EPA 연합뉴스
24일로 우크라이나 전쟁이 8개월째로 접어들며 러시아가 미국·영국 등과 잇따라 접촉해 우크라이나가 ‘더러운 폭탄’을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가 자신들이 핵무기를 선제적으로 쓸 의사가 없다는 뜻을 드러내며 긴장 완화에 나선 것인지, 또다른 기만전술인지 주목된다.
러시아 국방부는 23일 텔레그램을 통해 세르게이 쇼이구 장관이 “23일 벤 월리스 영국 국방장관과 전화 회담을 통해 우크라이나가 ‘더러운 폭탄’을 쓰는 도발을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영국 국방부도 23일 보도자료를 내어 “월리스 장관이 (이 통화에서) 러시아의 주장을 반박하고, 그러한 주장이 우크라이나에서 분쟁 확대를 위한 핑계로 사용돼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고 밝혔다.
‘더러운 폭탄’은 재래식 폭탄에 방사성물질을 가득 채운 방사성물질 무기를 뜻한다. 이 폭탄이 터지면 핵폭발과 같은 재앙적 결과가 발생하진 않지만, 광범위한 지역이 방사성물질로 오염된다. 러시아 국영 <리아 노보스티> 통신은 익명의 소식통에게서 얻은 정보라며 “우크라이나가 자신들의 땅에서 이른바 ‘더러운 폭탄’ 폭발과 관련한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며 “이런 도발의 목적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작전지역에서 대량파괴무기(핵무기)를 사용했다고 비난하고, 모스크바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한 강력한 반러시아 선전을 시작하려는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쉽게 말해, 우크라이나가 스스로 ‘더러운 폭탄’을 터뜨린 뒤 이를 러시아의 핵 공격으로 뒤집어씌울 수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통신은 “만약 이 도발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면, 대부분의 나라가 우크라이나의 ‘핵사고’와 관련해 (러시아에) 극히 가혹하게 대응할 것”이라며 “그 결과 모스크바는 많은 핵심 동반자들의 지지를 잃을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는 즉각 반박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23일 “이 전쟁에서 더러운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원천이 어디일지는 모두가 다 알고 있다”며 “유럽의 우리 쪽 지역에서 핵무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주체이다. 이는 쇼이구 동지에게 이날 전화를 하라고 명령한 그 사람”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우크라이나에 핵을 쓴다면, 그 주인공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드리트로 쿨레바 외교장관도 “우리는 더러운 폭탄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획득할 계획도 없다”며 “러시아는 종종 자신이 계획하는 것으로 남들을 비난한다”고 주장했다.
쇼이구 장관은 이날 영국뿐 아니라 미국·프랑스·튀르키예 국방장관과도 연쇄 전화 회담을 했다. 특히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과 통화를 한 것은 21일에 이어 불과 이틀 만이다. 미 국방부도 이 통화에 대한 성명을 내어 오스틴 장관이 “상황 악화를 불러올 수 있는 러시아의 행동에 대한 어떤 핑계도 거부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미국·영국·프랑스 외교장관도 같은 날 공동성명에서 “우리 모두는 러시아의 뻔히 들여다보이는 허위 주장을 거부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전문가들은 ‘더러운 폭탄’ 공방은 러시아와 서구 사이의 타협 여지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러시아 대외정책 연구기관인 외교국방정책협의회 표도르 루키야노프 의장은 이 논란을 두고 “(핵을 둘러싼) 긴장이 모두에게 진정한 위협이 되는 수준까지 접근했다는 공통된 감정이 있음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크림대교 폭발 이틀 뒤인 10일 러시아 안전보장회의에서 “위협에 상응하는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적이 있다. 이 말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상응하는 대응’의 선을 넘어선 핵 공격을 할 의사가 없음을 보여준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러시아는 앞서도 우크라이나가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 적이 있다. 미국 등 당시에도 러시아의 이런 주장이 최악의 참사에 대한 책임을 우크라이나에 돌리려는 ‘기만전술’이라고 우려해왔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