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룡 경찰청장이 6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미근동 경찰청에서 ‘정인이 사건’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황준범 | 워싱턴 특파원
한동네에 살던 한 한국계 미국인은 학교 숙제를 하지 않고 친구와 놀려고 하는 초등학생 아들을 꾸짖으며 구둣주걱으로 엉덩이를 몇 대 때렸다. 며칠 뒤 주정부 산하 아동보호서비스(CPS·시피에스) 상담사가 집으로 찾아왔다. 아이가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엄마한테 혼났다”고 말했고, 학교는 시피에스에 신고한 것이다. 이들 부모는 45일간의 관찰 기간이 지난 뒤에야 시피에스로부터 ‘사건 종결’ 통보를 받았다. 지나간 경험담처럼 대화를 나눴지만, 아동학대 문제에 매우 엄격한 미국을 간접적으로 실감할 수 있었다.
양부모의 학대와 방치로 생후 16개월 만에 세상을 뜬 정인이 사건은 다시 떠올리기조차 겁날 정도로 끔찍하고 안타깝다. 감히 비할 바 아니지만, 만약 정인이가 미국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정인이의 양부모는 아이를 학대하면서도 죄의식이 전혀 없었고, 어린이집과 의사의 세 차례 신고에도 경찰은 허망하게 돌아섰다. 미국에서도 이랬을까.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위원으로 20년간 교육현장을 지켜본 문일룡 변호사는 “세 차례나 신고가 들어갔는데도 필요한 조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라고 말했다. 초동 단계에서 아이의 멍 자국만 갖고도 당국이 적극 개입해 부모-아동 분리 조처 등이 이뤄졌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한국과 미국에 엄청난 제도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한국과 미국 모두 유치원·학교 교사와 의사 등 아동 관련 종사자들은 아동학대·방치 의심 사례가 발생하면 반드시 경찰이나 관련 기구에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미국에 시피에스가 있듯이, 한국에도 아동보호전문기관을 둬서 경찰과 민간이 함께 대처하도록 하는 등 기본적인 틀거리는 유사하다.
문제는 이런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이다. 우선, 현장에서의 협업이다. 미국의 경우 아동학대·방치 신고는 경찰과 시피에스가 긴밀하게 공조해서 다룬다. 전문적 훈련을 받은 공무원인 시피에스 상담사는 아동학대·방치에 대해 평가, 조사, 개입할 권한을 갖는다. 경찰은 처벌 등 형사적 접근을 한다. 한 경찰은 “한국도 경찰과 전문기관의 협업 체계가 있지만 미국처럼 유기적이지 못하다”고 말했다. 미국이었다면, 정인이에 대한 1차 신고 때부터 “오다리 교정을 위해 다리 마사지를 해준 것”이라는 양부모의 설명은 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적 차이도 크다. 아동학대를 신고하는 자나 출동한 경찰이나 아이 부모의 항의가 부담스러운 것은 한국과 미국 모두 똑같다. 위에 든 학부모는 그 일로 아이 담임선생님과 몹시 어색해졌다. 그럼에도 관계 불편을 감수하고 어린이의 안전부터 생각해 전화기를 드는 게 미국이다. 미국 지방정부에서 아동 관련 업무를 맡고 있는 한 지인은 “어린이 학대·방치 관련 모든 사례에 ‘아이가 죽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접근한다”고 말했다. 최초 사례 발견부터 신고, 상담, 조사, 처분 등의 각 단계마다 고강도의 의무와 책임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어린이들에게 안전한 나라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미국에서는 한 해 약 70만명의 어린이가 학대·방치를 당한다. 엄격한 대응 체계를 갖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2014년 미국인 양아버지의 폭력으로 숨진 현수 사건도 있다. 하지만 신고가 세 차례나 묵살당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아이에게 사소한 이상만 감지돼도 언제든 집 밖의 개입과 심각한 처벌로 이어질 수 있다는 보편적 경각심은 한국보다 미국이 높은 것 같다. 또 다른 정인이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게 남은 어른들이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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