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10일 공군 이 중사 추모 및 국방부 규탄 기자회견 참석자들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정문에 국화를 꽂고 손팻말을 붙이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기억할게 오늘도 내일도/ 잊지 않을게 언제나 있었듯이/ 멀어졌지만 너는 왜 가깝게 느껴질까/ 네가 남긴 추억을 간직할게.”
지난 5월 상관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은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아무개 공군 중사의 오빠이자 가수인 보름(활동명)은 지난달 21일 추모곡 ‘기억할게’를 내놨다. 이 중사가 피해를 호소하고 세상을 떠난 지 불과 70여일. 여론이 들끓는 와중에 지난 12일 해군에 복무하던 또다른 여군이 상관에게 당한 성추행 피해를 신고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판박이 사건이 벌어졌다. 비극이 쳇바퀴를 돌고 있지만, 당장 이 중사 사건 처리는 석연찮은 상태로 조금씩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유가족의 바람과 달리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서서히 잊히는 건 아닐까.
애초 군에선 누구 하나 이 중사 사건을 외부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성추행 사건 발생 초기, 가해자가 피해자를 상대로 “(용서받지 않으면) 하루 종일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자해 협박’을 하는가 하면, 가해자 가족과 소속 부대 상사들이 나서 피해자뿐 아니라 그의 남자친구(5월20일 혼인신고)에게까지 피해사실을 함구하라고 회유했다. 이 중사가 극단적 선택을 한 사실이 열흘 만에 여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그때 군 조직이 나섰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이 6월30일 공군 이아무개 중사 사건을 덮으려 한 공군 군사경찰 관련 문건을 공개하고 있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군사경찰과 군검찰은 진상조사보다 사건 은폐에 우선 총대를 멨다. 해당 부대 군사경찰 대대장은 가해자 조사도 이뤄지기 전에 “불구속을 원칙으로 압수수색을 최소화하라”며 수사팀에 사실상 사건 축소 지시를 내린다. 피해자의 국선변호인으로 지정된 군법무관은 공군본부 법무실 소속이었다. 4월7일 군사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군검찰은 이 중사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달 보름 가까이 수사를 개시하지 않았다.
군의 이런 태도는 이 중사 사망 직후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비영리 민간단체 군인권센터가 지난 6월30일 공개한 공군본부 군사경찰단의 사건보고서(5월23일)를 보면, 공군경찰은 먼저 공군참모총장(세번째 사건보고)에게 “사망자는 강제추행 사건의 피해자였음”, “강제추행 사건 가해자 비호 여부 조사 예정”이라며 사실대로 보고해놓고, 같은 날 국방부 보고(네번째 사건보고)에서는 이 내용을 고스란히 뺀다. 또 공군 내부 보고서에 있던 “유가족은 강제추행 사건의 가해자가 (딸에게) 선처를 요구하여 (딸이) 힘들어했다며 조사 및 처벌을 요구함”이라는 내용도, 국방부 보고서에서는 “사망 동기를 명확히 밝혀달라며 애통해하는 것 외 특이반응 없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군인권센터는 공군이 국방부에 허위보고를 하고, 조직적으로 진실을 덮으려 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5월31일 이 중사의 가족이 ‘사랑하는 제 딸 공군 중사의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세요’라는 국민청원을 올리고 나서 군의 태도는 완전히 뒤바뀐다. 이번엔 군이 가장 요란스럽게 사태 수습에 나섰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빈소를 찾고, 특별수사단이 꾸려졌다. 사흘 만에 가해자(장아무개 중사)가 구속되고, 국방부는 원점 재수사를 천명했다.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이 사퇴하고, 국방부 검찰단이 부실수사를 했던 공군 검찰을 압수수색했다. 부실수사와 직무유기 등 관련자 47명에 대한 수사와 인사조처가 이뤄졌다. 공군은 창설 이래 최대 규모라는 점을 강조했다. 민간이 참여한 수사심의위원회가 꾸려지고, 특임 군검사 제도도 도입했다. 모두 군 역사상 처음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지난달 9일 군검찰이 중간수사결과를 내놓으며 군은 이 사건의 정리 수순에 돌입했고, 이후 사회적 관심은 보름여간 열린 도쿄올림픽으로 쏠렸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사람이 40만명을 넘어 이번에야 군대 내 성폭력 문제를 비롯한 군 인권침해 문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처럼 떠들썩했지만, 실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셈이다. 유족은 국방부 중간수사결과 발표에 항의하며 특임 군검사를 임명해 재수사할 것을 요청했다.
“군이 부대 내 사망사건을 처리하는 방식은 ‘영웅 만들기’ 아니면 ‘사건 감추기’ 둘 중 하나다. 군 조직을 이해하는 사람은 다 아는 얘기다.
2011년 17사단에서 잡초 제거 작업 중 병사가 실족사하자, 사단장이 나서서 후임병을 구하려던 것으로 조작하라고 지시한 게 들통난 적이 있었다. 영웅 만들기의 대표적 사례다. 반면 인권침해 사건은 거의 100% 은폐·축소 시도가 있다고 보면 된다. 알려지지 않으면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이다. 그나마
피해가 사망사고로 확대된 뒤 실체가 드러나면 유가족이 억울함이라도 호소할 수 있다. 이 경우에도 군은 요란스러운 대책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시간을 끌면서 사건이 잊히도록 한다. 이런 시스템은 암묵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마치 작전을 벌이듯 작동한다.”
국방부 전직 고위간부 출신 한 인사는 최근 <한겨레>와 만나 군의 공군 중사 사건 처리를 이렇게 분석했다
. 과거 군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망사건을 봐도 ‘폐쇄적 군 구조에서 사건 발생 → 가해자와 주변인의 은폐·무마 시도 → 피해자 사망 → 군 수사기관의 부실수사 → 외부 기관에 의한 사건 실체 확인 → 군 지휘부의 요란스러운 사과와 대책 마련 → 중간수사결과 발표 → 군사법원의 솜방망이 처벌’이란 과정을 통해 사건을 무마, 축소, 은폐, 조작해왔다는 것이다.
실제 2014년 선임병들의 잔혹한 가혹행위로 숨진 윤승주 일병(당시 20살·사망 뒤 상병 진급) 사건은 ‘군의 사망사건 조작·은폐 구조 종합판’으로 불렸다. 사건 성격 자체는 다르지만, 폐쇄적 군 구조에서 시작된 인권침해가 사망사건으로 이어지자 군 조직이 적극 은폐하려 한 공군 이 중사 사건과 그대로 닮았다.
그해 3월부터 윤 일병을 상대로 부대 고참들의 폭행이 한달여간 이어졌다. 매일 100대 가까운 폭행, 치약과 가래침 먹이기, 성추행이 있었고, 윤 일병이 힘들어하면 비타민 수액을 주사한 뒤 다시 폭행했다. 강압적 계급구조에서 선임병들의 집단 가혹행위에 윤 일병이 저항할 방법은 없었다. 사망 당일엔 윤 일병에게 강제로 냉동만두를 먹이다가, 그가 의식을 놓은 채 오줌을 싸며 뒤로 쓰러지는데도 ‘꾀병을 부린다’며 다시 구타했다. 폭행 과정에서 윤 일병이 갑자기 사망하자, 가해자들은 목격자들을 위협해 은폐를 시도했다. 군은 수사에 나섰지만 사건을 조기에 수습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검 당시 온몸에 멍자국이 있는데도 군 당국은 사건보고서에서 “선임병에게 구타당한 뒤, 음식물에 기도가 막혀 사망했다”며 사인을 ‘기도폐쇄에 의한 뇌손상 사망’으로 규정했다. 군검찰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여 가해자들을 살인죄 대신 상해치사 혐의로 구속 기소한다. 불과 한달여 만에 사단 군사법원은 일사천리로 재판을 시작했다. 윤 일병 사망 9일 뒤 세월호 참사에 사회적 관심이 모두 쏠렸던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하지만 사건 발생 넉달 뒤, 군인권센터가 윤 일병이 한달여간 고문에 가까운 가혹행위를 당한 끝에 사망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사건이 확대되고 국회와 대통령까지 나서자 군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우선 사인이 ‘음식물에 의한 질식사’에서 ‘과다 출혈에 의한 속발성 쇼크사’로 바뀐다. 주요 가해자들의 공소장도 살인죄로 변경된다.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이 사과 성명을 내고, 관련자들이 줄줄이 추가 구속됐다. 가해자에게 최대 형벌 부과, 국방부 검찰단의 추가 수사, 지휘관(사단장) 보직해임과 인사 조처가 이어졌다. 민관군 병역혁신위원회 가동, 인권교육 강화 등 실효성이 떨어지는 사후 조처들이 ‘공식처럼’ 쏟아졌다.
6월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공군 부사관 성추행 사건 관련 긴급현안질의에서 박주민 위원장 직무대리가 피해자가 검찰에 제출한 탄원서를 읽고 있다.
군 수사기관 등이 공식적인 절차를 통해 피해자에게 책임을 덮어씌우듯 사건을 처리하는 경우도 있다. 2018년엔 충남 서산 공군 20전투비행단 행정병 최현진 일병(당시 23살)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전입 직후부터 숨지기 전까지 상관으로부터 매일 가혹한 질책과 조롱이 이어졌다. 최 일병의 어머니는 “나라를 믿은 내가 죄인”이라며 원통해했지만, 군검찰은 “최 일병이 스트레스와 심적 부담을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며 가해 상관의 모욕 혐의를 증거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리했다. 가해자는 군사법원에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만 인정돼 벌금 200만원으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한겨레>와 만나 “군사경찰과 군검찰이 허술한 수사를 벌여 사건의 심각성을 축소하고, 결과적으로 군사법원도 이를 근거로 재판을 통해 가해자를 솜방망이 처벌하는 과정이 메커니즘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군 이 중사 사건 이전, 성범죄 피해 뒤 여군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세차례 사건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 2010년 3월 강원도 한 부대에서 심아무개 중위(당시 25살)가 상관으로부터 성희롱과 지속적인 가혹행위 피해를 입은 끝에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당시 군 수사기관은 ‘남자친구와 결별에 따른 상실감’으로 사건을 묻었다. 하지만 4년 뒤 국민권익위원회 조사를 보면, 당시 군 수사기관은 상관의 상습적인 성희롱 등 여러 가해 사실을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가해자 처벌을 지휘했어야 할 사단장은 보고를 받고도 구두경고로 사건을 끝냈다. 2013년 전방 15사단에 근무하던 오아무개 대위가 직속상관인 노아무개 소령의 성폭력에 시달리다 스스로 삶을 내던졌을 때도, 2017년 해군 ㄱ대위가 상관으로부터 성폭력 피해를 입은 뒤 목숨을 끊었을 때도 군은 철저한 진상규명보다 ‘조용하고 빠른 사건 처리’를 우선시했다.
악순환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 12일 상관에게 성추행 피해를 입은 해군 ㄱ중사가 부대 숙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다시금 벌어졌다. 5월말 성추행 피해 신고가 처음 이뤄졌고, 지난 7일 두번째 신고가 이뤄졌지만 결국 피해자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가 70여일 만에 이뤄진 점 등으로 미뤄, 그사이 부대 차원의 조직적 은폐 시도가 있었을 것이란 의혹이 나온다. 해군 당국자도 “70여일 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가 수사 초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군 부대관리훈령은 ‘성폭력에 대한 고충을 접수한 자는 이를 묵인하거나 은폐, 조작하여서는 아니된다’(243조 3항)고 규정하고 있지만 철통같은 담장을 두른 군 내부에선 이런 지침이 역주행을 했다. 2019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은 ‘군대 내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보면, 성희롱 사건 피해자들이 생각하는 군의 태도는 ‘사건 축소 및 은폐’(25.2%)가 가장 높다.
2014년 28사단 윤승주 일병이 구타 사고로 숨진 뒤 나흘 만인 4월11일 사단 헌병대의 현장검증 장면. 4월6일 오후 집단구타를 당하던 윤 일병의 정신이 혼미해지자 이아무개 상병이 물을 먹이는 모습을 재현한 모습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2014년 9월 28사단 윤 일병 폭행사망사건 재판이 경기도 용인 3군사령부 보통군사법원에서 재개돼 가해 장병들이 법정에 앉아 있다. <경기신문> 제공
2005년 육군훈련소에서 훈련병 192명에게 인분이 묻은 손을 입에 넣도록 한 사건이 발생하자, 군은 인권개선위원회와 범정부 병영문화개선대책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2012년엔 병영문화 선진화 방안을 내놨고, 2014년 윤 일병 사망사고 땐 시민단체와 군인 가족들이 포함된 민관군 병영혁신위원회 가동, 보호관심병사 관리와 고충처리 시스템 개선, 전군 인권교육 강화 등의 대책을 내놨다.
군 성범죄가 잇따르던 2015년엔 ‘가해자 원아웃 퇴출’을 포함한 성폭력 근절 종합대책도 약속했다. 군이 이렇게 무수히 내놓은 대책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일반 기업이나 사회 조직과 견줘 군 조직이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낙후된 계급·성별 위계가 굳건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책 자체가 ‘면피성’에 그치거나,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웠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이 중사 사건 직후 최영애 위원장 명의의 성명을 통해 “폐쇄적이고 상명하복적인 문화로 인해 피해자는 군에서의 피해 사실을 내부에 알리기도 어렵고, 설령 어렵게 알린다 할지라도 고립이나 회유, 불이익 조치 등으로 인해 절망하는 일이 반복된다”고 비판했다.
이번에도 군은 국방부 장관 직속 성폭력 대응 전담조직 마련, 국방부 소속 군사법원과 각군 참모총장 소속 검찰단 창설, 성범죄 전담 재판부 및 수사부 운영 등 제도 개선 대책을 쏟아내고 있다. 정치권을 중심으로 사안이 심각한 군 범죄 수사·재판을 민간에 맡기는 군사법원법 개정 논의도 진행되고 있다. 김영수 국방권익연구소장(예비역 해군 소령)은 <한겨레>에 “군 범죄행위를 감시하고, 국방장관이나 검찰총장에게 수사까지 의뢰할 수 있는 군인권보호관 관련 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만큼 법에 근거해 외부기관을 통해 군 범죄를 막아야 한다”며 “군이 사건이 확산되면 보여주기 식으로 관련자들을 줄줄이 엮어 넣은 뒤 겉만 그럴싸한 대책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면 앞으로도 또 다른 피해자를 막을 수 없다”고 말했다.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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