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왼쪽), 박병대 전 대법관(가운데), 고영한 전 대법관(오른쪽).
사법농단이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2011년 9월~2017년 9월) 사법부 행정 업무를 맡는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에 개입하고 법관의 독립을 침해한 사건이다. 2017년 2월 법원행정처에서 일하게 된 이탄희 당시 판사가, 판사들의 사법 개혁적 학술대회를 저지하라는 업무 지시를 거부하면서 ‘판사 뒷조사 문건’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세차례의 법원 내부 진상조사(2017년 4월, 2018년 1월·5월)가 진행됐고 검찰 수사로 2018년 11월~2019년 3월 전·현직 판사 14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사법농단’에 연루돼 검찰이 재판에 넘긴 전·현직 판사는 총 14명, ‘비위 법관’으로 통보한 판사는 66명이다.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7년이 지났지만 처벌과 징계는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사법농단 연루 판사들은 아직도 1심 재판이 진행 중이거나 상당수가 무죄를 받아 법원을 떠났다. 그중 일부는 사법농단의 또 다른 한 축인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자리 잡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함께 재판에 넘겨진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은 2022년 2월 김앤장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 부당하게 개입한 혐의로 기소됐다. 사법부 주요 현안이었던 ‘상고법원’을 도입하고자 박근혜 정부 청와대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대법원과 청와대(외교부), 일본 전범기업 소송대리인인 김앤장이 피해자를 배제한 채 따로 만나 재판 개입을 모의했다는 게 박 전 처장에게 적용된 주요 혐의다. 1심만 1500일 넘게 진행되는 동안 박 전 처장은 법원에서 퇴직하고 ‘재판 개입 모의 상대자’로 지목된 김앤장으로 옮겼다. 그 외에도 유해용·김민수·노재호·김봉선 전 판사가 ‘김앤장 변호사’의 길을 선택했다. 한 현직 판사는 “사법 신뢰를 중대하게 훼손한 판사들과 로펌이 사법농단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들의 힘을 유지하며 법조계에서 건재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무죄 확정’ 6명…이민걸·이규진은 1·2심 유죄
일부 판사들은 ‘무죄’라는 날개를 달았다.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과 이태종 전 서울서부지방법원장, 임성근·신광렬·성창호 전 부장판사와 조의연 부장판사다. 이들에게 적용된 ‘직권남용’ 혐의는 남용할 직무상 권한이 있는지부터 따져야 하는데, 법원은 이들이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애초에 없었으니 혐의가 성립할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 ‘권한이 없으니 남용도 없다’는 법리로 형사처벌을 피한 유 전 연구관은 김앤장, 이 전 원장은 법무법인 황앤씨, 임 전 부장판사는 법무법인 해광, 신 전 부장판사는 개인 사무실을 내고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을 제기한 가토 다쓰야 전 일본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명예훼손 재판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임성근 전 부장판사도 무죄가 확정됐다. 하지만 법원은 판결문에서 ‘헌법 위반’이라고 지적했고, 국회는 임 전 부장판사를 헌정사상 최초로 ‘법관 탄핵’ 심판대에 올렸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임 전 부장판사가 이미 퇴직했다는 이유로 국회의 탄핵 소추를 각하했다.
통합진보당 소송에 개입한 혐의로 기소된 심상철 전 서울고등법원장과 방창현 부장판사는 1·2심에서 ‘증거 부족’으로 무죄를 선고받았다. 수원지법 성남지원에 근무 중인 방 부장판사는 “잘못된 기소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3억원의 국가배상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이들이 재판사무의 핵심 영역에 관해 지적할 수 있는 권한(지적 권한)이 있다며 일부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가 이 ‘지적 권한’을 인정하지 않고, ‘재판에 개입할 권한 자체가 없다’고 판단하며 혐의의 상당 부분이 무죄로 뒤집혔다. 이 전 실장은 법무법인 화우에서, 이 전 상임위원은 법무법인 한결에서 일한다.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의 사건은 대법원에서 심리가 진행 중이다.
법원은 사법농단에 연루된 일부 판사들을 대법원 법관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그러나 징계 수준이 가벼운데다 내용도 비공개여서 ‘제 식구 감싸기’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 징계위는 2017년 8월 이규진 전 상임위원에게 감봉 4개월을 먼저 결정한 뒤, 2018년 12월 또 한차례 징계를 의결했다. 징계위에 회부됐던 판사 13명 중 7명은 감봉 3개월~정직 6개월을, 1명은 견책 처분을, 2명은 혐의는 인정되지만 징계하지 않는 ‘불문’ 결정을, 3명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가장 무거운 징계가 정직 6개월이었는데, 앞선 사례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가볍다. 2014년 9월 ‘정치 관여’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게 집행유예형이 선고되자, 이를 ‘지록위마’라며 공개 비판한 이동진 부장판사가 정직 2개월 징계를 받았다. 판결 비판을 이유로 정직 2개월 징계를 받았다면, 심리 중인 사건에 개입한 경우는 훨씬 무겁게 징계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법농단 비위 법관’으로 검찰이 법원에 통보한 66명에 대한 징계는 더 부실하다. 법원은 2019년 5월 비위 법관으로 통보받은 판사 66명 중 고작 10명만 징계위에 회부했다. 10명 중 신광렬 전 부장판사와 조의연 부장판사만 각각 감봉 6개월과 견책 징계를 받았고, 성창호 전 부장판사는 무혐의 결론 났다. 나머지 판사 7명을 비롯한 다른 비위 법관들에 대한 구체적 징계 내용은 법원이 “법관의 사생활”을 이유로 공개하지 않고 있다.
최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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