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앞줄)이 지난해 5월10일 서울 영등포구 국회에서 제20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친 후 이동하며 연도를 메운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선거 후보 시절인 지난해 2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로 한달 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일곱 글자 ‘여성가족부 폐지’에 이은 성평등 정책 후퇴의 신호탄이었다.
윤 대통령 취임 1년, 우려는 현실이 됐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을 드러내는 ‘여성폭력’이라는 용어는 물론이고, 헌법 가치인 성평등 관점이 국가 주요정책에서 사라지고 있다. 윤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지난해 10월 윤석열 정부는 결국 여가부를 폐지하는 내용의 정부조직 개편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올해 2월 국회를 통과한 정부조직법 개정안에서 여가부 폐지안은 빠졌지만, 국제사회는 현 정부의 여가부 폐지 시도를 우려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세계 최대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이하 국제앰네스티)가 10일 윤 대통령 취임 1년을 맞아 반페미니즘에 맞선 여성들을 인터뷰했다. 이들은 여가부 폐지안으로 대표되는 현 정부의 정책 기조가 우리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한겨레〉는 윤 대통령이 남은 임기 4년 동안 성차별을 부정하거나 묵인하지 않고 성평등 증진에 앞장서야 한다는 차원에서 현 정부의 지난 1년을 돌아보며, 국제앰네스티와 협업해 인터뷰 내용 일부를 글로 전한다.
여파(활동명)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가 지난달 2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윤석열 정부의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여파(활동명)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의 대표는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라는 윤 대통령의 발언을 대표적인 반여성인권 발언으로 꼽았다. 김여진 대표는 “윤 대통령 말처럼 구조적인 성차별이 없다면 왜 여성 임금은 남성 임금보다 계속 낮은지, 왜 여성은 어두운 밤 길거리를 다닐 때 두려움을 느껴야 하는지, 왜 여성은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 ‘혹시 저 나사 구멍 뒤에 불법촬영 카메라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을 느껴야 하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 현실은 ‘구조적 성차별이 없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과 다르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오이시디)에 가입한 1996년 이후 줄곧 오이시디 회원국 중 ‘성별임금격차가 가장 큰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7월 기준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31.5%로 오이시디 평균(11.7%)을 훌쩍 넘어선다.
여성에 대한 폭력도 마찬가지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 통계를 보면 2021년 기준 성폭력범죄 피의자 4만810명(신원미상 제외) 중 90.3%(3만6869명)가 남성이고, 피해자 3만1418명(신원미상 제외) 중 90.4%(2만8402명)가 여성이다.
2021년 8월 국민의힘 초선의원 모임 초청 강연에서 한 “페미니즘이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돼서 남녀 간 건전한 교제 같은 것도 정서적으로 막는다는 얘기가 있다”는 윤 대통령의 발언은 페미니즘에 대한 그의 시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은 “평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페미니즘인데, 평등이 부재한 여성과 남성 간 교제가 과연 건전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장예정 위원장은 또 “윤 대통령이 취임 후 여러 연설에서 ‘
자유’를 많이 강조했는데, 평등이 부재한 자유는 오히려 젠더 불평등을 포함한 사회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예정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이 지난달 2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윤석열 정부의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여성을 차별하고 성적 대상화하는 남성 중심 사회구조를 인정하지 않는 윤 대통령 인식은 성평등 정책 전담기구인 여가부 정책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여가부는 ‘
버터나이프 크루’ 사업을 지난해 갑자기 중단했다. 2019년부터 청년들의 성평등 문화 확산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이었다. 또 2019년 12월 시행된 여성폭력방지기본법에 근거한 첫 법정실태조사인 ‘
2021 여성폭력 실태조사’를 당초 예정보다 5개월 뒤인 지난해 8월 발표하면서, 보도자료를 통한 공표가 아니라 여가부 누리집에만 올리는 소극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 실태조사는 우리나라 성인 여성 3명 중 1명이 살면서 한 번 이상의 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지난해 9월엔 1997년부터 양성평등주간(매년 9월1일∼7일)마다 발표해온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을 ‘
2022 통계로 보는 남녀의 삶’으로 이름을 바꿔 발표했다. 성차별 해소를 목표로 국가 주요정책을 세우는 ‘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2023∼2027년)’에서는 ‘여성폭력’이라는 용어가 대폭 빠졌다. 당초 올해 4월 공표하기로 한 ‘
2022 성폭력 안전실태조사’ 최종 결과도 아직까지 발표하지 않고 있다.
구조적인 성차별 문제를 외면하는 현 정부 기조는 여가부 폐지안이 포함된 정부조직 개편안 발표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교육부는 지난해 11∼12월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서 ‘성평등’ ‘성소수자’ ‘재생산(성·재생산권)’ 용어를 모두 삭제했다. 이같은 개정안을 넘겨받은 국가교육위원회는 ‘섹슈얼리티’ 용어까지 새 교육과정에서 빼버렸다. 법무부는 올해 1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에 포함되어 있던 ‘비동의 강간죄’ 신설 계획을 철회했다.
저출생 정책도 예외가 아니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올해 3월 발표한 ‘저출산·고령사회 정책 과제 및 추진 방안’을 보면, 앞서 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정부가 수립한 1~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도 포함됐던 ‘성평등’ 용어(‘양성평등’ 용어 포함)는 단 한 차례도 등장하지 않았다.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나영 대표가 지난달 19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윤석열 정부의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SHARE)의 나영 대표는 “성평등 정책은 단순히 여성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주거, 노동, 교육, 보건의료, 복지 등 모든 생활 영역에서 모든 사회 구성원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평등하게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과 맞물려 있다”며 “여가부 폐지는 (단순히) 정부부처 하나가 없어지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젠더 관점(성인지적 관점)이 결여된 정책 시행으로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하락시키는 일”이라고 우려했다. 국제앰네스티도 “젠더 정책을 관할하는 컨트롤타워 부재는 여성 인권을 증진시키는 방식이 아니다”라며 “(여가부가 폐지된다면) 성평등 관련 법·정책들은 다른 정부부처로 파편화되어 연결되지 못하고 (정책 우선순위에서도) 후순위로 밀리게 될 것”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젠더 고정관념에서 기인하는 불평등은 여성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의 삶도 위협한다. 성소수자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은 이성애만을 정상으로 여기는 사고(이성애 중심주의)에서 기인한다. 성별을 남성과 여성 두 개의 성별로만 인식하고, 이에 따라 인간 삶의 요소를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으로 나눠 서로 다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젠더 불평등이다. 이런 이분법적 성별로 분류할 수 없는 성별정체성을 지닌 존재는 젠더 불평등에 의해 사회에서 배제된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인 박한희 변호사는 “성평등은 성소수자 인권과 분리된 개념이 전혀 아니다”라며 “법령 제정과 정책 기획, 예산 편성 등의 과정에서 성평등 관점이 결여된 점이 있는지 계속 감독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역할을 하는 국가기구가 필요하다. 이 기구를 쪼개면 그런 감독 기능이 사실상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이처럼 성평등 정책 전담기구가 없어지면 이는 성소수자 인권 후퇴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인 박한희 변호사가 지난달 21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윤석열 정부의 지난 1년을 돌아보는 주제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올해 1월 말 유엔인권이사회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국가별 인권상황 정책검토(UPR) 심의를 진행하기 전, 미국과 캐나다는 사전 질의를 통해 여가부 폐지에 관해 물었다. 두 나라는 여가부의 업무가 보건복지부로 이관됐을 때 젠더 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 및 여성(여아 포함)의 동등한 기회 보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질의했다. 이에 정부는 “여가부 정책과 업무는 (복지부로 이관되더라도) 축소·약화되지 않는다”고 답했지만, 전문가들은 구조적 성차별 해소를 위해서는 성평등 정책 전담기구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국제앰네스티도 같은 입장이다.
국제앰네스티는 10일부터 ‘젠더 불평등을 폐지하라, 여성가족부 말고’라는 구호(슬로건)을 내건
국제 탄원 캠페인을 시작한다. 국제앰네스티 누리집에 접속해 ‘여성가족부 폐지 계획을 중단하라’ ‘여성의 사회·경제·정치적 참여를 보장하고 성평등 확립과 젠더 기반 폭력 종식을 위한 국가 정책과 예산을 마련하라’는 온라인 탄원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국제앰네스티는 올해 9월 탄원서를 모아 대통령실에 전달할 계획이다. 국제앰네스티는 인터뷰 풀영상 또는 개별 인터뷰를 담은 동영상 시리즈를 11일을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오세진 기자
5sji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