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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여성

‘병난 남편’ 나의 비리는 무죄일까

등록 2006-11-07 18:33

2050 여성살이 /

남편이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심한 근시에다 몇 해 전 당뇨병 진단을 받은 뒤라 신경이 쓰인다. 일중독인 그가 일주일 넘게 휴가를 얻는 걸 보니 스스로도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모양. 통원 수술 후 한두 번 병원에 가는 외엔 거의 열흘 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다. 날마다 뭇국과 미역국을 번갈아 끓이고 간식과 반찬 준비에 부산을 떤다. 아이들뿐 아니라 내 자신도 ‘가정적인’ 남편에 적응이 안 된다. 대구에 따로 사는 남편은 금요일 밤늦게 서울집에 도착하곤 한다. 아이들과 나는 가족간 ‘느슨한 유대’를 표방하며 아빠와 남편의 눈을 피해 맘껏 자유롭게 살아온 셈이다.

병가 중에도 낮 동안 전화와 메일로 원격 업무를 처리하던 남편이 저녁 시간에는 표변한다. 좋아하는 텔레비전 연속극이 생긴 것이다. 방영 시간을 기다리며 아이들에게 지난 줄거리 브리핑까지 한다. 전에는 〈불멸의 이순신〉이나 근현대사를 다룬 역사물과 다큐를 좋아해 채널을 두고 아이들과 다투기도 했다. 결혼을 앞둔 아들과 딸의 엄마들이 신경전을 벌이며 상대방의 기를 꺾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코믹 줄거리를 재밌어 하는 남편은 연속극을 보는 내내 웃어댄다. 딸은 “아무래도 아빠의 테스토스테론 분비가 줄어든 모양”이라고 화학적 분석을 한다. 가만히 보니 요즘 들어 아이들에게 부쩍 더 자주 말을 걸고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전엔 한두마디로 끝낼 일도 말수가 제법 늘었다. 20년 넘게 그를 관찰해온 나로서도 흥미있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혹시 말로만 듣던 남성 갱년기 증세가 아닐까?

어눌하고 과묵했던 남편은 할 말 다하고 사는 처자식들 등쌀에 나름대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 같다. 직장을 옮겨 다니며 아이 둘 낳아 기른 걸 나는 언제나 생색냈다. 엄청난 희생이라도 치른 것처럼 일하는 여성의 이중 부담에 대해 떠들어 댔으니 말이다. 그 주장의 밑바닥에는 내가 손해봤다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편은 가해자였을까? 책읽는 걸 좋아하고 동작이 느린 그는 센스있게 아부하는 요령을 타고나질 못했다. 내가 부산을 떨며 음식 장만을 하다 소리쳐 불평하기 전엔 밥상에 수저조차 놓아주지 않던 남편. 책에 코를 박고 있으니 밥이 타는지 국이 넘치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그렇게 얄밉던 남편이 당뇨 판정 후 왠지 꺼칠해 보이고 슬슬 가엾기까지 하다. 그의 발병에 내 책임은 없을까? 나의 비리는 사실 한둘이 아니다. 싸울 때 답답하면 우선 소릴 지르고 보는 내 급한 성미부터 켕기는 것투성이다. 매운 걸 못 먹는 남편에게 내 식성대로 얼큰 육개장을 듬뿍 떠줘 그를 며칠씩 설사에 시달리게 한 적까지 있다. 내 온갖 비리를 20년 넘게 참아준 남편이니 나 또한 그에게 조금씩 너그러워지고 있는 모양. 부부는 사랑보다 의리로 산다더니 바야흐로 그 연대로 진입하고 있는 걸까?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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