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훈 기자
김동훈 기자의 슬램덩크
잠실체육관은 1979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첫선을 보였다. 좌석이 1만2천석으로 당시로선 엄청난 규모였다. 관중석이 찰 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당시 여자농구 인기는 실로 엄청났다. 개막전부터 빈 틈없이 꽉꽉 찼다. 당시 국가대표 ‘미녀가드’ 정미라씨는 “정말 엄청난 구름 관중이 몰렸다”고 회고했다. 한국농구의 ‘메카’가 장충체육관에서 잠실체육관으로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여자실업팀은 한때 13개에 이르렀다. 강현숙 정미라 박찬숙 홍혜란 김영희 등 스타도 차고 넘쳤다.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선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은메달을 땄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린 농구대잔치 동방생명(현 삼성생명)과 국민은행의 라이벌 대결은 관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여자농구는 1997년 국제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았다. 13팀이 고작 5팀만 남고 잘려나갔다. 이듬해 한국 여성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프로리그를 출범시키며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하지만 각 팀은 승부에만 집착했다. 간판 선수와 외국인 선수에게 엄청난 돈을 쏟아붓고 있다. 여자프로배구는 최근에야 억대 연봉선수가 탄생했지만 여자프로농구는 이미 지난해 2억원 넘는 선수가 2명이나 나왔다. 웬만한 주전급은 대부분 억대다. 외국인 선수는 월봉 상한선이 3만달러다. 남자농구 2만달러보다 많다. 거기에 뒷돈까지 얹혀진다. 3~4개월 뛰고 20만~30만달러를 챙기는 선수도 있다. 이러니 “월봉은 핌 베어벡보다 많다”는 소리가 과장도 아니다. 외국인 선수 한달치 월급이면 초등학교 팀 1년치 예산이다. 서울지역 여자 초등학교팀은 달랑 2개에 불과하다.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은 수년 전부터 ‘리바운드(다시 뛰자) 코리아’를 외친다. ‘어게인 1979’라는 말도 등장했다. 여자농구 중흥을 뜻하는 구호다. 하지만 각급 학교 농구부는 자꾸만 줄어들고 있다. 거꾸로 가는 여자농구 현실이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