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구 관장이 보여준 프랑스어 번역본 <춘향전>. 김옥균을 암살한 홍종우(1850∼1913)가 1892년 프랑스 체류중 동양학자인 로니와 함께 번역한 것으로 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여 관장은 근대 문학자료도 국가에서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도서판매·건물로 번 40억 몽땅 고서 사들여
300평 박물관 열었지만 일반인 냉담에 창고로
“책 모으는 재미 블랙홀과도 같아 돌이킬수 없어”
지금은 우리 금속활자본 책 전시 꿈 가져
300평 박물관 열었지만 일반인 냉담에 창고로
“책 모으는 재미 블랙홀과도 같아 돌이킬수 없어”
지금은 우리 금속활자본 책 전시 꿈 가져
한국의 책쟁이들/(18)여승구 화봉책박물관 관장
“나는 고서를 사다가 망한 사람이오.”
화봉문고 대표 겸 화봉책박물관 관장인 여승구(71)씨는 책을 빼고는 사실상 빈손이다.
1963년 사업을 시작해 1979~1988년 ‘한국출판판매주식회사’로 서점을 겸한 것을 빼고는 외국 학술잡지와 일반도서 수입판매를 해온 그는 2003년부터는 고서 판매로 전업해 자신의 호를 따서 화봉문고를 만들었다. 1982년부터 수집해온 10만여점의 고서와 각종자료를 바탕으로 한 것. 2005년 10월에는 화봉책박물관을 열었다. 하지만 인터넷 판매와 경매대행을 하는 화봉문고는 개점휴업 상태이고 화봉책박물관 역시 1년 남짓 존재하다가 창고와 사이버공간으로 사라졌다.
“그의 방은 매우 작았지만 그래도 동, 서, 남쪽 삼면에 창이 있어, 동에서 서쪽으로 해 가는 방향을 따라 빛을 받아가며 책을 읽었다. 행여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책을 대하게 되면 번번이 기뻐서 웃고는 했기에, 집안 사람들 누구나 그가 웃는 모습을 보면 기이한 책을 얻은 줄 알았다. …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책에 미친 바보’라고 불렀지만 그 또한 기쁘게 받아들였다.” 옛문헌에 전하는 책바보 이덕무(1741~1793)의 모습이다.
종로구 신문로 2가 ‘화봉책박물관’ 이름이 붙은 300평 건물. 여승구씨는 볕이 잘 들지 않는 뒤쪽방 한칸을 1만여권의 ‘책에 관한 책’ 창고를 겸해 사무실과 인터넷 쇼핑몰 작업공간으로 쓰고 있다. 재개발로 헐린 서린동 서점 건물을 팔아 대토한 자리. 한 대기업이 건물을 지어 구내식당으로 이용케 하다가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한 곳이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공간을 다시 임대하고 자신은 뒤로 물러앉았다. 박스에 싸여 사직동 100여평의 창고로 옮겨간 고서들은 아직도 ‘분류중’이다.
반짝 책박물관 기억은 씁쓸하다.
“방문자는 주로 단체관람 어린이들이었지요. 부모 손잡고 온 유치원, 초등학교 저학년들…. 조건은 관장이 나와서 안내하라는 것이었지요. 아이들한테 어떻게 설명하겠어요? ‘민족과 영토’ 전시회를 할 때였어요. 아이들을 이끌고 전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우리나라를 처음 연 할아버지가 누구죠? 단군 할아버지요. 나라 땅을 가장 많이 넓힌 임금님은? 광개토대왕이요. 한글은 누가 만들었나요? 세종대왕이요. 그리고 고지도 앞에 가서는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를 같이 부르는 식이었지요. 전문가들은 거의 오지 않았어요. 어쩌다 대학교 문헌정보학과 학생들이 레포트 쓰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공짜 도록만 바라는 시민들에 실망 박물관을 연 동안 ‘민족과 영토’ ‘세상에서 가장 큰책 작은 책’ 등 몇 차례 주목할 만한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주로 어린 손님만 들었을 뿐 일반인들의 관심은 냉담했다. 전시회 도록을 비싼 돈을 들여 만들었지만 다들 공짜로 얻어갈 생각만 할 뿐이었다. “희생을 무릅 쓸 이유는 충분하지만 파리만 날리니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박물관을 창고와 사이버로 옮겨간 이유다. 앞으로 전시회는 계속 열 생각이다. 다만 수익자 부담의 원칙. 책은 얼마든지 빌려주겠다. 하지만 공간임대와 관리 반환 등은 주최쪽에서 감당하라는 거다. “문화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에 짙은 회한이 묻어났다. 책 수집가의 도착점은 ‘행복한 박물관’이라는데 책바보 여씨의 26년 도착점은 무척이나 쓸쓸하다. “새책을 팔아 헌책과 고서를 사들였으니 쟁여놨으니 망할 수밖에 더 있겠어요? 건물 판 돈 40억이 고스란히 책에 들어갔다고 봐야죠.” 주변에서는 가치있는 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기좋은 말일 뿐 실제 짐은 오로지 여씨 몫이었다. 박물관에 이르려다 실패한채 책만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다. 나라에서 떠맡아주면 좋으련만. 한번은 문화부 장관을 만나 국립 책박물관을 만든다면 자신이 수집한 책을 조건없이 바치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일생을 건 일이니 그렇게 해도 승리한 삶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라는 말을 듣고는 두말없이 돌아섰다. 도서관은 콘텐츠 중심으로 운영하는 곳이지 유물로서 가치가 있는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도서관 대부분은 고서구입 예산이 없고, 있다고 해도 규모가 적어 싸구려 문집을 구입하는 정도라고 한다. 또 그가 서점을 운영할 때 언뜻 보았던 사서들의 다른 얼굴이 생생하다. 좋은 책을 갖추기보다 책 구입에 따른 떡고물에 관심을 더 쏟던. 국립박물관도 마뜩찮다. 문화재로 지정하는 책들은 불경에 치우쳐 나머지 가치있는 책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텬로역뎡>을 꺼내왔다. 푸른색 겉포갑을 열자 녹색 비단 안포감이 나오고 다시 그것을 열자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한적 두 권이 나왔다. 1983년께 일본 오사카역 앞 지하상가의 한 고서점에서 96만엔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1895년 서울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존 번연 원작을 선교사인 게일 부부가 번역 출판한 목판인쇄본이다. 삽화는 기산 김준근이 그렸다. 단원 삽화의 정리자본 <오륜행실도>, 역시 단원 그림이 든 목판본 <불셜대보부모은듕경>(1795, 화산 용주사 간행)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미서에 속한다. 김포세관에서 밀수품으로 분류돼 반송되었다가 두달 뒤 직접 가지고 들여와 품에 안은 것이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서 보전가치가 있는데도 연대가 오래된 것 위주로 지정하는 문화재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여씨가 보여주는 <화사집> 역시 그렇다. 현대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지만, 미당이 직접 제본한 것 가운데 세번째이고 표지의 제목에는 시인 정지용의 묵적이 어렸다. 나라에 기증하는 것도 쉽지 않아 그가 수집한 책들은 고활자본, 문학(고전문학, 신문학), 개화기 교과서, 고지도, 고판화 등 다섯가지 테마.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물건으로서 값을 동시에 가지는 것들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까닭에 도서관에서도 박물관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아 개인 소장으로 관리되고 있다. 별도의 수입이 없는 여씨는 다섯 테마 외의 고서를 판 돈과 건물 임대료를 고서 보관료로 충당하고 있다. 그가 가진 두번째 꿈. 문화에 뜻이 있는 대기업에서 일괄 인수해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적당한 값을 쳐주면 넘길 생각이다. 그래도 절반의 성공일 테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그런 의사를 대놓고 공표하지 않고 있다. 그가 고서 덫에 걸린 것은 26년전 술자리에서다. 1982년 윤석창씨 소유의 책으로 두달간의 한국문학작품초판본 전시회를 마치나서의 뒤풀이. 한 일간지의 문화부장이 꺼낸 말이 씨가 됐다. 그 책들을 경매에 붙여 팔지 말고 여사장이 사들여 문학박물관을 만드는 게 어떻겠는가? 여씨는 자신을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에 비유했다. 그로부터 2, 3년간 강아지가 주인 따르듯 서지학자인 안춘근씨의 뒤를 따라 헌책방을 다니며 책 보는 눈을 키웠다. 그렇게, 초판본 전시회에서 만난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은 320여종의 다른 판본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에서 만난 <텬로역뎡>은 100여종의 다른 판본까지 인연이 넓어졌다. “책 모으는 재미가 엄청 났지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책은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전광석화같은 순간에 인연이 아니면 그곳에 내가 그자리에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것이 블랙홀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죠.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지경이었어요.” 1986년인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판판매업자모임인 ‘디스트리프레스’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프라도박물관 옆 고서점에서 그레고리안성가집을 발견했다. 수집가들이면 누구나 탐내는 물건. 7천달러라는 값도 문제려니와 문화재 반출이 금지된 탓에 만지작거리다 나왔다. 돌아오는 길 택시에 지갑을 두고내리는 통에 나머지 기간동안 쫄쫄 굶고 걸어다녔던 기억이 있다. 책 소식지·전시회에도 숱한 ‘바보짓’ 바보짓은 책에서 책에 관한 것으로 확대되었다. 1976년에는 잡지 <월간독서>를 창간해 1980년 강제 폐간되기까지 ‘이달의 좋은 책’ ‘독서대상’ 등을 선정해 시상했다. 1982~88년에는 <책방소식>을 49호까지 냈고 <고서통신>은 1987~2000년 모두 17호를 냈다. 1982년 한국문학작품초판본 전시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40여회의 책관련 전시회를 주최 또는 후원했다. 모두 돈쏟아붓기였다. “한류는 잠시지만 문화유산은 유구합니다. 구텐베르그보다 100여년 앞선 우리의 금속활자보다 더 좋은 한류아이템이 어디 있습니까.” 여씨는 아직 인생역전을 꿈꾼다.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을 실물크기로 전시하고 그 가운데 우리의 금속활자본 책을 전시하는 꿈.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공짜 도록만 바라는 시민들에 실망 박물관을 연 동안 ‘민족과 영토’ ‘세상에서 가장 큰책 작은 책’ 등 몇 차례 주목할 만한 전시회를 열었다. 하지만 주로 어린 손님만 들었을 뿐 일반인들의 관심은 냉담했다. 전시회 도록을 비싼 돈을 들여 만들었지만 다들 공짜로 얻어갈 생각만 할 뿐이었다. “희생을 무릅 쓸 이유는 충분하지만 파리만 날리니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박물관을 창고와 사이버로 옮겨간 이유다. 앞으로 전시회는 계속 열 생각이다. 다만 수익자 부담의 원칙. 책은 얼마든지 빌려주겠다. 하지만 공간임대와 관리 반환 등은 주최쪽에서 감당하라는 거다. “문화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말에 짙은 회한이 묻어났다. 책 수집가의 도착점은 ‘행복한 박물관’이라는데 책바보 여씨의 26년 도착점은 무척이나 쓸쓸하다. “새책을 팔아 헌책과 고서를 사들였으니 쟁여놨으니 망할 수밖에 더 있겠어요? 건물 판 돈 40억이 고스란히 책에 들어갔다고 봐야죠.” 주변에서는 가치있는 일 한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기좋은 말일 뿐 실제 짐은 오로지 여씨 몫이었다. 박물관에 이르려다 실패한채 책만 끌어안고 있는 모양새다. 나라에서 떠맡아주면 좋으련만. 한번은 문화부 장관을 만나 국립 책박물관을 만든다면 자신이 수집한 책을 조건없이 바치겠다고 말했다. 자신의 일생을 건 일이니 그렇게 해도 승리한 삶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하라는 말을 듣고는 두말없이 돌아섰다. 도서관은 콘텐츠 중심으로 운영하는 곳이지 유물로서 가치가 있는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도서관 대부분은 고서구입 예산이 없고, 있다고 해도 규모가 적어 싸구려 문집을 구입하는 정도라고 한다. 또 그가 서점을 운영할 때 언뜻 보았던 사서들의 다른 얼굴이 생생하다. 좋은 책을 갖추기보다 책 구입에 따른 떡고물에 관심을 더 쏟던. 국립박물관도 마뜩찮다. 문화재로 지정하는 책들은 불경에 치우쳐 나머지 가치있는 책들을 홀대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그는 <텬로역뎡>을 꺼내왔다. 푸른색 겉포갑을 열자 녹색 비단 안포감이 나오고 다시 그것을 열자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한적 두 권이 나왔다. 1983년께 일본 오사카역 앞 지하상가의 한 고서점에서 96만엔을 주고 구입한 것이다. 1895년 서울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존 번연 원작을 선교사인 게일 부부가 번역 출판한 목판인쇄본이다. 삽화는 기산 김준근이 그렸다. 단원 삽화의 정리자본 <오륜행실도>, 역시 단원 그림이 든 목판본 <불셜대보부모은듕경>(1795, 화산 용주사 간행)과 더불어 한국의 3대 미서에 속한다. 김포세관에서 밀수품으로 분류돼 반송되었다가 두달 뒤 직접 가지고 들여와 품에 안은 것이다. 아름다운 문화유산으로서 보전가치가 있는데도 연대가 오래된 것 위주로 지정하는 문화재 대열에 끼지 못하고 있다. 여씨가 보여주는 <화사집> 역시 그렇다. 현대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그렇지만, 미당이 직접 제본한 것 가운데 세번째이고 표지의 제목에는 시인 정지용의 묵적이 어렸다. 나라에 기증하는 것도 쉽지 않아 그가 수집한 책들은 고활자본, 문학(고전문학, 신문학), 개화기 교과서, 고지도, 고판화 등 다섯가지 테마.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물건으로서 값을 동시에 가지는 것들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까닭에 도서관에서도 박물관에서도 관심을 두지 않아 개인 소장으로 관리되고 있다. 별도의 수입이 없는 여씨는 다섯 테마 외의 고서를 판 돈과 건물 임대료를 고서 보관료로 충당하고 있다. 그가 가진 두번째 꿈. 문화에 뜻이 있는 대기업에서 일괄 인수해 박물관을 만드는 것이다. 적당한 값을 쳐주면 넘길 생각이다. 그래도 절반의 성공일 테다. 하지만 미련이 남아 그런 의사를 대놓고 공표하지 않고 있다. 그가 고서 덫에 걸린 것은 26년전 술자리에서다. 1982년 윤석창씨 소유의 책으로 두달간의 한국문학작품초판본 전시회를 마치나서의 뒤풀이. 한 일간지의 문화부장이 꺼낸 말이 씨가 됐다. 그 책들을 경매에 붙여 팔지 말고 여사장이 사들여 문학박물관을 만드는 게 어떻겠는가? 여씨는 자신을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에 비유했다. 그로부터 2, 3년간 강아지가 주인 따르듯 서지학자인 안춘근씨의 뒤를 따라 헌책방을 다니며 책 보는 눈을 키웠다. 그렇게, 초판본 전시회에서 만난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은 320여종의 다른 판본으로 확대되었고, 일본에서 만난 <텬로역뎡>은 100여종의 다른 판본까지 인연이 넓어졌다. “책 모으는 재미가 엄청 났지요. 예상치 못한 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나는 책은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전광석화같은 순간에 인연이 아니면 그곳에 내가 그자리에 있었겠어요. 하지만 그것이 블랙홀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거죠. 그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힘든 지경이었어요.” 1986년인가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출판판매업자모임인 ‘디스트리프레스’ 국제회의가 열렸을 때. 프라도박물관 옆 고서점에서 그레고리안성가집을 발견했다. 수집가들이면 누구나 탐내는 물건. 7천달러라는 값도 문제려니와 문화재 반출이 금지된 탓에 만지작거리다 나왔다. 돌아오는 길 택시에 지갑을 두고내리는 통에 나머지 기간동안 쫄쫄 굶고 걸어다녔던 기억이 있다. 책 소식지·전시회에도 숱한 ‘바보짓’ 바보짓은 책에서 책에 관한 것으로 확대되었다. 1976년에는 잡지 <월간독서>를 창간해 1980년 강제 폐간되기까지 ‘이달의 좋은 책’ ‘독서대상’ 등을 선정해 시상했다. 1982~88년에는 <책방소식>을 49호까지 냈고 <고서통신>은 1987~2000년 모두 17호를 냈다. 1982년 한국문학작품초판본 전시회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40여회의 책관련 전시회를 주최 또는 후원했다. 모두 돈쏟아붓기였다. “한류는 잠시지만 문화유산은 유구합니다. 구텐베르그보다 100여년 앞선 우리의 금속활자보다 더 좋은 한류아이템이 어디 있습니까.” 여씨는 아직 인생역전을 꿈꾼다. 광개토대왕비문 탁본을 실물크기로 전시하고 그 가운데 우리의 금속활자본 책을 전시하는 꿈.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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