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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일본내 반조선인 시선 관동지진 때처럼 살벌

등록 2006-11-02 19:41

북 핵실험뒤 만경봉호 입항 금지로 교류 타격
조선학교는 차별심해 학생수 ‘뚝’ 재정난
한쪽에 한류 있지만 혐한류 분위기도 거세
젊은층 민족성 고수 사명감이 그나마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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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과 밖/재일조선인연구 1인자 오규상씨 인터뷰

“경력만 보면 완전히 ‘빨갱이’입니다만, 이쪽 기준으로 보면 경직됐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 부드럽고 유연해 보이십니다.”

“전 언제나 이런 식입니다.”

“사상이 너무 약한 건 아닌가요.”

“25일 행사에서 한 분이 저를 ‘빨갱이’로 소개하시면서, 제가 들어오는 것이 남쪽 사회의 발전을 말해준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언제나 이렇습니다. 총련서 보면 희미한 쪽에 들어가는지도 모르죠.”(웃음)

오규상(58) 재일조선인역사연구소 연구부장은 선한 표정에 자주 환한 웃음을 지었다. 북의 핵실험으로 어려움이 예상되고 때로 심각한 대화가 오갔지만, 그는 내내 편안한 태도로 거리낌이 없었다. 북이 아닌 일본에 사는 동포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민족교육을 강조하며 가르침에 뜻을 둔 학자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소속 연구자다. 남북화해협력정책을 편 국민의 정부 이래 예전같은 거부감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의 뇌리엔 ‘문세광’, ‘간첩’, ‘조총련’(이전 반공 드라마 등을 통해 조총련이라는 명칭이 부정적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에 이들은 조총련 아닌 총련으로 불리길 바란다) 등의 단어와 함께 기억되는 조직에 속해 있다. 총련 산하 민족학교인 조선대학에서 33년 3개월간이나 교수로 있다가, 2년 전부터 연구소로 적을 옮겼다. 게다가 북한 김일성대학에서 철학 학사와 사회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재외동포이사장의 ‘빨갱이’란 소개가 꼭 지나친 건 아니라는 말이다.


그는 인터넷 신문 통일기자들과의 간담회 및 제3회 재외동포 엔지오(NGO)대회(10월25~27일)의 주제발표를 위해 한반도 남녘 땅을 밟았다. 대회 첫날 ‘조일(북일)수교와 재일조선인’이란 주제의 역사나눔마당에서 주제발표를 했다. 2003년 이맘 때 처음으로 2박3일간 한국에 머물렀던 이래 3년만이다. 그때는 ‘재일동포 가해’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회의 참석차였다. 이제 짐작하겠지만, 그는 재일동포 역사 연구에서 손꼽히는 학자다. “총련과 북조선에서 재일조선인 연구의 제1인자로 자타가 인정하는 분”이라고 동석한 황의중 재외동포엔지오대회 추진위원장은 소개했다.

그를 26일 오전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났다. 그의 첫번째 남쪽 방문에 대한 이야기로 대화를 열었다.

-2003년엔 어떻게 왔나?

=2002년 9월17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평양선언 뒤 납치문제가 노출되면서, 우리 치마 저고리를 입은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마구 행패를 부리는 등 별별 사건이 다 일어났다. 냠쪽의 양심적인 분들이 그 문제를 토의하자고 해, 총련 정식 대표로 왔다. 하지만 오후에 들어와서 준비하고 이태원에서 해물탕 한그릇 먹은 게 다다. 다음날 하루종일 회의한 뒤, 그 다음날 바로 가는 일정이었다.

-부모님 고향은 가봤나?

=경북 의성인데, 못가봤다. 이번에도 가볼 예정이 없다. 부모님은 세상 떠나기 직전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지만, 국적을 (조선에서) 바꿔야 해서 그걸 못하셨다.

-북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는데.

=일본에는 총련 민족학교가 있다. 나는 1955년 초등학교 들어가 조선대학교까지 나왔다. 북에 간 것은 조국과 일본에 왕래 길이 열리면서, 조국에서 77년 총련 조선대 교원들과 학자들을 위해 통신박사원제도를 만들어줬다. 제가 그 1호다. 논문을 작성해놓고 북으로 가서 집중지도를 받는 방식으로 2년만인 79년 9월 학위를 받았다.

-일본내 조선인 연구를 전문으로 삼았는데 계기는 뭔가?

=우리 민족이 일본에 끌려온 과정과 해방 이후 어떤 조직을 묶고 활동했나 등을 체계화할 필요를 느꼈다. 민족교육 과정에서 우선 우리 자신의 역사부터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조선인이 일본 사나” 물을 정도

대화는 점차 일본 내 동포들의 상황과 대북제재, ‘한류’ 등 그의 전공으로 깊이 들어갔다. 그는 이 대목에서 가장 심각했으나, 가끔씩 유머를 섞어 웃음을 끌어냈다.

-2003년과 비교해 지금 일본 내 동포들의 상황은 어떤가?

=역사 이래 제일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다. 반공화국, 반총련, 반조선인 분위기와 책동이 어느 때보다 심하다. 관동(간토)대지진을 방불케 한다. 그때 6000명 학살당했는데, 잘못하면 지금도 ‘조선사람 잡아라’고 할 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분위기다. 이번에 온 것도 이런 문제를 남쪽 동포에 말씀드리기 위해서다.

-일본의 대북제재로 북쪽과의 교류에 타격이 크겠다.

=제일 큰 건 북을 오가는 통로가 돼온 만경봉92호 입항을 금지한 것이다. 비행기도 있지만, 비싸다. 만경봉 하면 가족, 친척, 몸 나쁜 사람들 모두 편하게 가고, 짐도 몇개나 가지고 가는데 못하게 됐다. 조선학생들도 조국 수학여행을 비행기로 가게 돼, 더 내야 하는 돈만 3천700만엔 가량으로 손해가 나고 있다. 만경봉호로 군수물자를 보낸다면 짐을 다 조사하면 된다. 돈도 몇백만엔 가져간다 하면 조사하면 된다.

-핵실험 따른 지금 상황 보면 우려스러운 점이 많을텐데

=핵 관련해 공화국(북한) 입장은 보도된 그런 것이고, 우리 민족 바라는 것은 온나라 비핵화라고 생각한다. 핵 없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우리도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사태 관련해선 미국의 조선 적대정책의 결과라고 본다.

-주로 남쪽과의 관계가 되겠지만, ‘한류’는 어떻게 보나?

=<대장금> <겨울연가> 등 남쪽 드라마며 배우들에 대한 일본내 분위기는 분명 긍정적면이 있다. 그러나 한쪽에서 한류가 있고, 다른 한쪽에선 반조선인 분위기, 혐한류도 아주 세게 있다.

-남쪽 드라마는 봤나?

=많이 보긴 했다. <겨울연가> <명성황후> <여인천하> 봤고, 최근엔 <이순신> 보는데, 인내심이 필요하다. 104부까지 있다.(웃음) <모래시계> 보고 처음으로 남쪽이 변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일본인들이 남북을 구분하나?

=일본 사람들이 잘 이해 못하는 게 있다. 일본 사람 모임 나가서 조선사람이라 하면, 어째서 조선사람이 일본에 있는가를 묻는다. 일본 전체 외국인의 30%나 되는 사람들이 왜 존재하는가를 모르는 것이다. 한번은 어떤 지역의 시장이 총련 지부위원장을 불러 만나는 자리가 있었는데 “일본말이 통하는가, 언제 북반부에서 파견돼 왔는가”라고 물을 정도였다. 잘 모른다. 일본 역사교육의 잘못이다. 일본이 조일관계를 제대로 가르쳐야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다.

-개인적으로 경험한 가장 큰 차별은 뭔가?

=나 자신 투쟁하는 입장에서 살아왔는데, 역시 주택문제, 직업문제, 법적 지위 등이다. 우린 매일 외국인등록증을 갖고 다녀야 한다. 벌거벗은 목욕탕 안에서도 갖고 있어야 하는가가 한때 논란이 됐다.(웃음) 상시휴대 의무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걸 어겨 60만명 정도가 경찰에 붙잡힌 것으로 돼 있다.

-전후 젊은 동포 세대의 변화도 클 텐데?

=통계 내보면 1세대는 6%대 정도다. 지금은 3세, 4세가 주류다. 세대 교체되면 아무래도 민족의식, 고향 생각 약해진다. 또 지금은 그동안의 투쟁 결과로 주택문제나 대기업 취업 등 일부 시민적 자유가 확대됐다. 이젠 동포사회에서 떨어져도 혼자 살 수 있다는 의식들이 있다.

-교편생활하며 젊은 학생들의 변화도 예민하게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긍정적인 것은 민족성을 지켜야겠다거나 조국과 민족을 위한다는 사명감은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또 웃어른, 선배 잘 모시는 유교적 풍습도 잘 유지되고 있다. 일본 청년과 달리 조선대 학생들은 어른 앞에서 담배 안핀다.

젊은층 자유확대 뒤 시야 넓어져

-장래에 대한 생각들은 어떤가?

=이전에 비해 활동무대가 넓어지면서, 자기가 개척하자는 분위기가 있다. 한때 우리는 일본 국외로 못나갔다. 60만의 도슈(섬에 갇힌 수인)라고 했다. 지금은 조선국적 사람들도 다 나가서 활동할 수 있게 돼, 젊은 세대들이 더 시야가 넓어지고 있다.

-조선학교 상황은 괜찮나?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재정적 어려움이 있다. 줄어드는 건 조선학생 차별이 심하다 보니 일본학교에 가는 게 편한 사정도 있다. 또 일본학교는 수업료가 없지만, 우리는 수업료에 급식비, 교통비 등 일본학교보다 10배 이상 든다. 민족성 강한 사람은 무리해서 보내지만, 없는 사람은 보내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나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역사연구소 연구부장인데, 연구 관련 계획은?

=연구소는 아직 발족된 지 2년밖에 안된다. 재일동포 운동과정의 업적을 정리하자고 해서, 우선 1945년 이후 조련시기, 민정시기 재판록, 삐라 등 자료를 수집하고 있다.

-연구자로서 남쪽을 오가는데 제약같은 건 없나?

=총련 큰 간부도 아니지만, 여러 형태로 제약은 있다. 아직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살아 있는데 잘못하면 언제든지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인터뷰=강태호, 정리 손원제 기자 wonje@hani.co.kr, 사진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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