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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햇발] 청와대는 마비됐다 / 여현호

등록 2010-01-28 22:14수정 2010-01-29 16:44

여현호  논설위원
여현호 논설위원
김용갑 전 한나라당 의원의 자서전 <굿바이 여의도>에는 5공 때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일하면서 ‘땡전뉴스’를 고친 이야기가 나온다. 밤 9시 시보와 함께 ‘전두환 대통령은 오늘…’이라고 시작되는 텔레비전 뉴스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걱정해 직언으로 대통령을 설득했다는 이야기다. 잘못을 지적하는 참모의 용기와, 직언을 받아들이는 대통령의 배포가 강조돼 있다.

물론, 역사를 꼭 그렇게 개인 구실로 볼 일도 아니고, 다른 버전의 뒷이야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1986년에 민정수석이 됐다. <한국방송> 수신료 거부 운동이 나오고 막무가내식 정권 홍보에 대한 반발이 널리 퍼져 있을 때다. 누구의 건의가 아니라도 땡전뉴스 식의 억지를 더는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김 전 의원이 대한항공 007기 피격으로 승객 전원이 사망한 날에도 대통령의 새마을 조기청소 얘기가 뉴스 첫머리에 나온 것을 ‘정도가 심한’ 사례로 들었다지만, 그 사건은 1983년 9월1일의 일이다. 정권 쪽 사람들조차 ‘이건 아닌데…’라고 생각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겨우, 그러니까 엉덩이에 불이 붙은 다음에야 강단 있는 참모가 직언을 결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 강단도 과소평가할 순 없다. 자서전엔 없지만, 당시 청와대엔 그와 뜻이 같았던 사람이 여럿이었다고 한다. 세련된 방식의 홍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대통령 앞에서 함께 이야기하자고 미리 약속했건만, 정작 회의에선 다들 입을 닫았다. 대통령은 문제를 제기한 그에게 ‘다 괜찮다는데 너만 왜 그러냐’며 힐책했다고 한다. 땡전뉴스의 ‘세뇌효과’를 그때까지도 믿었던 것이다. 결국, 민정수석이 출근 않고 며칠 버틴 뒤에야 겨우 직언이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김 전 의원이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말을 아낀 대목이다. 객관적인 상황이나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든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기는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

지금의 세종시 논란이 꼭 그 모양이다. 객관적으로 세종시 수정안이 정상적으로 국회를 통과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야당들의 반대가 더 굳어지는 양상이니, 당론 변경이건 국회 상임위나 본회의 통과건 될 일이 아니다. 애초의 표 계산이 어떠했고 대국민 설득 계획이 어떠했더라도 지금처럼 충청권 등의 반발 여론이 요지부동이면 다 무망한 일이다. 억지로 관철하려 들다간 여당 분당 등 정국 파행이 커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의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는 계산하기조차 힘들다. 이를 걱정하는 말들은 이제 한나라당 친이명박계 안에서도 공공연하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한나라당 지도부는 마냥 밀어붙이려고 한다. 무슨 계산이나 기대가 있다기보다 ‘가볼 데까지 가야 안 되겠느냐’는 식으로 비친다. 누가 봐도 안될 일인데 그렇게 접지 못한다면 다른 사정이 있다고 봐야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세종시 문제에 관한 한 최강경파는 이명박 대통령이라고 한다. 사실이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대통령 주변을 탓하게 되는 것도 이 대목이다. 대통령이 배포있게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직언도 무망한 일이긴 하다. 그렇다고 대통령의 비위나 맞추고 눈치나 보고, 잘못돼도 그저 따르기만 하는 참모들만 있다면 그 대통령은 망할 수밖에 없다. 참모 구실에 자부심이 컸던 김 전 의원이 후배 비서관들에게 충고했던 말이다. 나무로 만든 불상이 불에 견디지 못하는 것은 불에 넣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 뻔한 결말조차 알리지 못한다면 이미 마비된 조직이다. 시키는 일만 열심히 한다고 건강한 게 아니다. 그런 맹목은 나라를 병들게 한다.

여현호 논설위원yeop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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