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원
도쿄 특파원
“우리나라(일본)는 지금까지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우리나라가 약속한 조처를 포함해 성실히 이행해왔다. 산업유산 정보센터를 약속대로 2019년도 회계연도 안인 (2020년 3월 개소해) 오늘 일반 공개했다. 2015년 국제사회에 약속했던 스테이트먼트(발언)도 동 센터 안에 안내판으로 전시해놓고 있다.”
조선인이 강제노동을 당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하시마(군함도)를 포함한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 대한 전시 시설인 ‘산업유산 정보센터’를 일반 공개하기 시작한 15일. 오카다 나오키 일본 관방 부장관은 오후 정례 기자회견에서 산업유산 정보센터 전시 내용에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별은 없었다” 같은 전시가 포함된 점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약속을 지켰다”며 이렇게 주장했다. 오카다 부장관은 전시 내용을 추가하거나 변경할 생각도 없다고 밝혔다.
시계를 2015년 7월로 되돌려보자.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던 때다. 당시 사토 구니 주 유네스코 일본대사는 독일 본에서 열린 회의에서 “(하시마 등 일부 산업시설에서) 과거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 하에서 ‘강제노역’했던 일이 있었다”며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정보센터 설치 등과 같은 조처를 하겠다”고 말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일본의 세계문화유산 신청지인 나가사키현 하시마, 후쿠오카현 야하타제철소와 미이케탄광 등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가 있었음을 들어 비판하고 있었다. 이에 일본은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를 포함한 희생자를 기리는 조처를 하겠다고 한국뿐 아니라 국제사회에 약속한 것이다.
희생자를 기리는 시설이라며 일본 정부가 만든 시설이 산업유산 정보센터이기 때문에, 이 센터는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에 대한 단순한 홍보시설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오카다 부장관은 2015년 사토 일본대사가 했던 발언이 안내판에 적혀 있으니 약속을 지켰다는 말장난 같은 주장을 폈다. 발언은 산업유산 정보센터 내부 일본 메이지 산업혁명유산 등재 과정을 기재한 안내판 맨 아래에 적혀 있을 뿐이었다.
일본 정부가 억지 주장을 굽히지 않는 배경에는 유네스코의 미온적 태도가 있다. 유네스코 전체 예산 중 22%는 원래 미국이 부담해왔으나, 미국은 2011년부터 팔레스타인 정회원국 가입을 비판하며 분담금을 내지 않았고, 2019년에 아예 탈퇴했다. 2019년 기준으로 일본(11.05%)은 중국(15.49%)에 이어 유네스코 분담금을 두 번째로 많이 배정받은 국가다. 이 때문에 유네스코가 일본 눈치를 본다는 비판이 나온 지도 오래다. 2016년 한·중·일 등 8개국 14개 단체로 구성된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OW) 공동 등재를 위한 국제연대위원회가 ‘일본군 위안부의 목소리’라는 이름으로 관련 기록물 2744건을 등재 신청한 적이 있다.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분담금 지급을 거부하며 유네스코를 압박했다. 결국, 유네스코는 일본군 ‘위안부’ 기록물 등재를 2017년 보류했고, 이후 일본은 분담금 지급 결정을 내렸다. 일본의 산업유산 정보센터 약속 위반 논란 중에도 유네스코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베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청구와 관련해 한국 정부에 단골로 꺼내들었던 발언이 “약속을 지키라”는 것이었다. 일본이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는 가치가 법과 약속인 것처럼 말해왔다. 그러나 힘을 배경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약속이라면, 그 힘에 굴복해 국제기구마저 이행 여부를 문제 삼지 않는 약속이라면, 국제사회는 그것을 약속이 아닌 기만이라 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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