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놓인 남성 선임 부사관으로부터 성추행당한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영정을 유가족이 어루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이 공군 성추행 피해자 사망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지 나흘만인 4일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 총장의 사의를 즉각 수용했다”면서 사표 수리 절차를 밟기에 앞서 ‘재직 중의 부정비리와 관련된 조사가 먼저’라고 밝혔다. 이 총장 본인이 조사·수사 대상이라는 뜻이다. 청와대는 또한 서욱 국방장관의 거취와 관련해서도 “최고 지휘라인에는 누구도 예외일 수 없다”고 밝혀 이 총장이 물러나는 것만으로 이번 사태의 파장이 일단락되지 않을 것을 예고했다.
이 총장은 이날 오후 문자 메시지를 통해 “성추행 공군 부사관 사망 사건 등으로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사과드린다. 무엇보다도 고인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며, 유족분들께는 진심 어린 위로의 뜻을 전한다. 본인은 일련의 상황에 대해 무거운 책임을 통감한다”며 사의 표명을 밝혔다. 지난해 9월 공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그는 성추행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에 내몰릴 때까지 군이 사건을 은폐·무마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1년도 못 돼 물러나게 됐다.
하지만 이 총장의 ‘불명예’는 직을 내려놓는 선에서 그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이날 오후 브리핑에서 “문 대통령은 이 총장의 사의를 즉각 수용하였다. 사표 수리와 관련한 절차는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사의를 즉각 수용했다는 것은 수용의 ‘의사’를 말씀하신 것”이라면서 사표 수리 절차와 관련해선 “고위 공직자의 사표제출 시에는 재직 중에 부정 비리와 관련된 사항이 없는지 관련 기관의 조사가 진행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이어 “특히 이 건은 참모총장 본인이 조사나 수사를 받아야 할 사항도 있을지 모르는 사안이 겹쳐져 있어서 앞으로 절차가 필요하다”며 “이 절차를 가급적 빠르게 진행하겠다는 뜻은 문 대통령의 강한 의지가 함께 표현돼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즉, 사표 수리 전에 신속하고 철저한 수사가 전제돼 있음을 뜻한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또한 서욱 국방장관의 경질 가능성과 관련해 “현재 상태에서 (경질 질문은) 답하는 시점이 적절치 않다”면서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보고를 받은 이후의 조치 과정을 엄중하게 살펴볼 것이고 그 결과에 따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역시 엄정하게 처리할 것이라는 입장을 미리 말씀드린 바 있다”고 답했다. 서욱 국방장관 역시 조사·수사를 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군 당국은 이성용 총장과 서욱 장관이 사건을 인지한 것이 성추행 발생일로부터 상당히 뒤늦은 시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공군은 이 총장이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지 40여일 만인 4월14일 보고를 받았다고 전했다. 사실이라면 보고 자체가 늦어진 것인데, 상급부대 간 보고 과정에서 왜 이런 중요한 사실이 누락 됐는지 철저한 수사를 통한 사실 규명이 필요하다. 이 총장은 지난 2일 오후 국방부 검찰단이 부랴부랴 가해자인 장아무개 중사를 구속하자 “왜 이게(구속수사가) 이제 와서 되는 것이냐”고 한탄한 것으로 알려졌다. 엄정 수사를 촉구한 자신의 지시가 이행되지 않는 현실에 자괴감을 드러냈다는 것인데, 사건 해결에 좀 더 결연한 의지를 밝혔다면 지금과 같은 불행한 결과가 나왔을지 의심스럽다.
또한 국방부는 성추행 사건에 대한 대응 매뉴얼을 이미 몇 년 전에 제도적으로 정비해놓은 터였다. 2017년 초 ‘미투 운동’ 이후엔 관련 지침과 규정을 한층 더 선진적으로 손봤다. 국방부의 부대관리훈령이나 군이 ‘기밀’이라는 이유로 공개하지 않는 2020년 개정판 ‘성폭력 예방활동 지침’ 등을 보면, 피해가 발생할 경우 가해자·피해자를 즉시 분리하고, 엄정한 후속 조처를 취한다고 정하고 있다. 이 중사를 죽음으로 내몬 묵인·방조·은폐·비호 행위에 대해서도 “성폭력 행위자와 동일한 징계양정 기준을 적용”해 엄벌한다고 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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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오후 충남 계룡대 정문 모습. 국방부 검찰단은 이날 숨진 공군 부사관의 성추행 피해 사건과 관련해 공군본부 군사경찰단 등에 대해 압수수색을 했다. 연합뉴스
이번 사건은 단지 1차 가해인 성추행뿐 아니라 군의 ‘축소·은폐·왜곡’ 시도 등 2차 가해 역시 큰 문제였다는 지적이 나온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그런 점에서 이 사건은 지난 2014년 한국 사회를 큰 충격에 빠뜨렸던 육군 제28사단의 윤 이병 구타 사망사고와 닮았다”고 말했다. 당시에도 군은 윤 이병이 4월7일 선임들의 구타와 가혹 행위로 숨졌는데도 냉동만두를 먹다 죽었다고 허위 보고하는 등 100일 넘게 사고를 축소·은폐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박근혜 정부 역시 권오성 육군참모총장을 경질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군에서 발생한 성폭력 사건으로 총장이 물러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성범죄에 대한 대응을 잘못하면 총장까지 날아갈 수 있다는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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