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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알면 다쳐” ‘70년대 수학여행’은 지금도 계속된다

등록 2006-05-11 11:38수정 2006-05-15 18:24

[현장리포트] 수학여행의 달콤씁쓸한 추억과 비밀스런 사연/박주희

지난 1일 신문사로 서울의 ㅎ고 교사들이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면서 숙소 쪽으로부터 수고비 명목으로 140만원을 받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이튿날 오전 경북 경주로 수학여행 현장 취재를 나섰다.

경주로 가는 기차 안에서 1989년 ‘국민학교’ 수학여행을 떠올렸다. ‘수학여행비 아낀다’며 관광버스 2인용 좌석에 학생들 3명씩이 앉아서 갔다. 관광버스 기사가 ‘의자 밑에 묶어둔 안전띠는 절대로 손대지 말라’고 당부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좁은 여관방에 10명도 넘게 들어가서 냄새나는 이불을 서로 코에 갖다대면서 장난치던 기억은 그래도 웃으면서 떠올릴 만하다.

2명 좌석에 3명 앉아 가고 “의자 밑 안전띠는 절대 손대지 말라” 당부

그러나 그 수학여행의 점심 도시락은 지금도 머릿속에 ‘80년대의 헝그리한 장면 베스트 10’에 올라 있다. 경주의 한 유적지 주차장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었는데 반찬 뚜껑을 여는 순간 ‘아악’ 소리를 치며 뒤로 물러 앉았다. 3개쯤 포개져 있는 단무지 사이에 엄지손가락만한 벌레가 둥글게 몸을 말아서 누워있는 게 아닌가. 순식간에 벌레를 구경하려는 아이들이 몰려들어 소리지르고 사진을 찍는다고 법석을 떨었다. 선생님 한 분이 오시더니 한 마디로 상황을 종료시켰다. “갖다 버리고 친구 도시락 같이 먹어!’

어른들에게 수학여행에 대한 추억은 친구 얼굴에 낙서하고 치약 바르던 즐거운 장면 속에 형편없는 숙소와 맛없는 식사도 빠지지 않는다.

그때는 몰랐다. 왜 그런 형편없는 수학여행을 가야했는지.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렴풋이 이유를 알았지만, 이번 취재에서 확실히 그 이유를 알아버렸다. 2006년 봄에도 ‘그런’ 수학여행은 계속되고 있었다.

“수학여행 사전답사를 나온 중학교 교사”라고 소개하자
“교관들이 생활지도·유적지 안내…계약 하면 선생님 수고비도”

2일 오후 불국사 앞마당. 충북 ㄴ초등학교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다. 확성기를 입에 대고 아이들에게 불국사의 유물에 대해 설명하는 사람은 ‘△△유스텔’이라는 조끼를 입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학생들도 교사가 아니라 숙소에서 나온 ‘교관’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유스텔은 유스호스텔이 아니라, 수학여행단을 전문적으로 수용하는 대형여관들의 이름이다.

“수학여행 사전답사를 나온 중학교 교사”라고 소개한 뒤 한 교관에게 말을 걸었다.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ㅅ씨는 “교관들이 생활지도와 유적지 안내를 알아서 해준다. 구체적인 금액은 모르지만 숙소와 계약을 하면 선생님들 수고비를 알아서 챙겨주고 있다. 사전답사 나왔다고 얘기하면 오늘 공짜로 숙소에서 묵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알려줬다. 어느 학교에서 나왔냐고 캐묻는 바람에 더 구체적으로 둘러대기가 부담스러워 명함만 받아뒀다.

칸막이 가린 공간서 교사들 따로 식사 “부담스럽다” 반응에
“학생들이 가까이 가지 않도록 지도하고 있으니 선생님들은 걱정마시라”

같은 날 저녁시간, 유스텔이 밀집해 있는 불국사 들머리의 한 유스텔. 식당문을 열고 들어가자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둥근 접시에 밥과 반찬을 담아서 먹고 있다. 연근조림, 감자튀김, 햄·채소 볶음, 미역국 등이다. 한 쪽에는 칸막이로 가려진 공간에서 교사들이 따로 밥을 먹고 있다. 식탁 위에 전골냄비가 올려져 있고, 생선회와 푸짐하게 차려진 채소접시도 눈에 띈다. 숙소 주인에게 “학생들 보는 데서 선생님들끼리 따로 밥을 먹는 게 부담스럽다”고 하자, “학생들이 가까이 가지 않도록 교관들이 지도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근처의 또다른 유스텔. 이곳 풍경도 다르지 않았다. 교사들은 칸막이가 쳐진 공간에서 학생들과 다른 메뉴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 숙소 관리자에게 “교사들 식사를 따로 준비하지 말고 수고비를 받는 대신 계약금액을 깎아줄 수 없냐”고 물었다. “같은 지역 학교는 금액이 다 똑같아요. 학부모들이 학교마다 서로 비교를 하는데 한 학교만 여행비가 싸면 다른 학교 선생님들이 곤란해지잖아요. 선생님들이 돈을 안 받는다고 하셔도 깎아드릴 수는 없습니다.”

“교사 별도식사 대신 계약금 깎아줄 수 없나” 묻자
“한 학교만 여행비가 싸면 다른 학교 선생님들이 곤란해지죠” 대답

교사들이 리베이트를 거부하는 학교도 다른 학교 눈치를 살피느라 숙박비를 깎아주지 않는 게 불문율처럼 굳어져 있었다. 말썽이 생기지 않게 ‘리베이트’챙기는 관행을 안전하게 유지하는 나름대로의 원칙인 셈이다.

이 관리자는 “이곳 숙소들은 대부분 퇴직한 교장 선생님들이 ‘영업사원’으로 뛰고 있다”며 “학교와 계약을 해오면 건수에 따라 돈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또 “예전에는 선생님들에게 접대부가 있는 술집에서 술접대를 하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은 여성 교사들이 늘면서 술접대는 많이 없어져가고 있다. 대신 밤에 숙소에서 선생님들끼리 술 한잔 할 수 있도록 술과 안주는 준비해주고 있다”고 알려줬다. 서울 ㅎ고는 근처 숙소로부터 교사들 수고비로 한 반에 10만원씩을 받았다고 하자, “선물이나 수고비는 섭섭하지 않게 챙겨드리겠다”고 했다.

다음날 오전, 경주 국립박물관 주차장에서 관광버스 기사들에게 관광버스 계약에 관해 물었다. 역시 수학여행 사전답사 나온 교사라고 소개했다. 충북에서 온 한 기사는 숙박이나 식사문제는 기사들이 알아서 하는 조건으로 경주지역만 돌면 대략 하루 50만원이면 된다고 했다. 버스 한 대당 10만원씩을 챙겨주겠다고 교장 선생님께 전하라고 귀띔해줬다. 수고비를 안 받고 값을 깎아달라고 하자, 역시 “구체적으로 액수를 의논해 봐야겠지만 다른 데보다 너무 많이 깎아주기는 어렵다”며 곤란해했다.

경기지역에서 관광버스만 10년 넘게 운행한 박아무개씨는 “교사들 몫으로 돈을 챙겨 주는 게 싫어서 대신 버스비를 깎아주겠다고 하면 거절하는 학교가 대부분이라서 할 수 없이 계약 때부터 10%를 수고비로 책정해 두고 있다”고 털어놨다. 박씨는 “수학여행 따라다니다 보면 학부모 입장에서 울화통이 터질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아이들 식사나 도시락 반찬을 보면 내 자식은 정말 수학여행 보내기 싫어진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10년 경력 관광버스 기사도 “내 자식은 수학여행 보내기 싫어진다”

경주에서 만난 아이들은 “밤에 잘 때 좀 추워서 짱(짜증)났지만 괜찮다”고 했고, “밥이 그래도 급식보다 맛있어서 다행”이라며 웃었다.

수학여행에 마냥 설레 웃는 학생들에게 말을 걸면서 낯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학창시절 부푼 가슴으로 경주로 남해안으로 설악산으로 떠났던 수학여행들이 측은해졌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만난 이들은 하나같이 “수학여행뿐이겠냐. 체험학습이나 졸업여행 할 것 없이 학교 단체여행은 다 똑같다”고 혀를 찼다.

저마다 간직하고 있을 아련한 수학여행의 추억을 망치는 것 같아 안타까웠지만 어쩌랴. 보고 들은대로 기사를 써서 8일치 신문에 내보냈다. “정직하고 성실한 교사들을 기운 빠지게 하는 기사였다”는 예상된 반응도 있었지만, 반가운 메일 2통이 왔다.

첫번째 메일은 경기도 부천 도당초등학교가 졸업여행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졸업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학교운영위원과 6학년 학부모, 학생 등 30여명이 참여해 공개 심사를 통해 민주적인 방식으로 여행업체 2곳을 학교장에게 추천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심사에 앞서 업체로부터 숙소와 프로그램에 관해 설명을 듣는 자리도 마련하기로 했다.

서울 한양중학교 송윤관 교사는 업체에 맡기지 않고 교사들이 직접 준비하는 졸업여행을 소개하는 메일을 보내왔다. 이 학교는 몇년 째 교사들이 졸업여행 장소와 일정을 짜서 교사연수를 통해 프로그램을 충분히 검증한 뒤 학생들과 함께 여행을 다녀온다고 했다.

경기도의 한 기간제 교사는 “교무회의 시간에 한 교사가 ‘수학여행 때 교사들 식사를 따로 준비하지 말도록 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다른 교사들이 전혀 호응을 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업체에 돈을 받아서 회식이라도 하고나면 돈 몇 푼에 스승이기를 포기한 것 같아서 아이들 보기가 민망하다”고 말하는 ‘진짜 선생님들’의 입김이 세져야 한다. 학교운영위원회도 눈 크게 뜨고 감시해야 한다.

그래야 어른들이 ‘고생도 추억’이라는 미사여구 아래 체험했던 썩은 관행을 자라나는 아이들이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다.

경주/ <한겨레>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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